서양 미술사에서 죽으면서 유명해진 작가라고 하면
빈센트 반 고흐가 가장 대표적인데
이와 반대로 화려한 삶을 살다가
죽고 나서는 수백년간 잊혀진 화가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바로크시대의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카라바조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 메리시 라는 뜻으로
다비드상과 피에타로 유명한 동명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헷갈리지 않기 위해
생전에도, 사후에도 풀네이밍보다 카라바조로 불린다.
그의 그림은 키아로스쿠로 라는 기법을 사용해
배경을 어둡게, 중심이 되는 인물들에게는 밝은 빛을 비춰
인물에 더욱 집중하는 느낌을 준 기법의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후대 화가가
네덜란드 미술계의 거장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다.
1600년에 이르러서 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으며
교황청을 비롯해 교회와 당대 귀족들은 모두 그에게 작품을 부탁했고
수많은 작품을 남기면서 말 그대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 그가 왜 수백년간 서양 미술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20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재발견이 되었을까?
바로 정신병에 가까운 그의 개차반 같은 성격에 있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말다툼은 물론이고 폭행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고
심지어는 추기경의 손님까지 몽둥이로 때려눕혀 수감되기도 했다.
그는 수차례의 폭력행위와 말싸움 등으로 구속되었으나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상류층의 뒷배경으로 감형, 사면되거나
가택연금 등으로 풀려났음에도 개차반같은 행동은 멈출줄 몰랐고
결국에는 로마의 한 부유층 자제와 싸우다가 그를 살해하고 만다.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던 피해자의 가족들의 요구에
아무리 교회 등 상류층의 뒷배경들이라도 더 이상 카라바조를 커버칠 수 없었고
끝내 로마에서 참수형을 선고받게 된다.
참수를 선고받은 카라바조는 강박적으로 참수된 머리,
사형집행에 관련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 며 도주를 선택했다.
카라바조는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망명했는데
나폴리는 로마 당국의 관할권을 벗어난 덕분에
사형을 피할 수 있었으며
그의 그림을 알던 나폴리 귀족들에게 보호받으며
로마에 이어 나폴리에서도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봐야 다시는 로마로 돌아갈 수 없는 인생
그는 다시 한번 사면을 위해 몰타 기사단이 있는 몰타섬으로 향했다.
몰타섬에서 그는 성 요한의 참수라는 작품을 그렸고
기사단은 이 그림에 매우 만족하며 그에게 작가 기사 작위를 내리며
그의 사면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개버릇 남 못준다고
몰타 기사단에서도 또 귀족 기사와의 싸움을 일으켜
결국 기사단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자력으로 탈옥했다.
결국 몰타섬에서 시칠리아로 도주,
시칠리아에서 다시 나폴리로 도주하면서
몰타 기사단과 로마에서 온 추적자들에게 쫓기던 카라바조는
점점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로마에서 온 소식은 희망적이었다.
로마에서는 그의 사면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를 하고 있었고
카라바조는 로마 교황청에게 선물로 줄 그림을 배편으로 떠나보냈다.
하지만 그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림만을 로마로 보내고 본인은 열병과 납중독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로마에서 바로크 시대를 연 미술가.
빛을 이용해 등장인물들의 표현을 극대화한 미술기법의 탄생
파괴적인 인생사, 하지만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던 인생사 덕분에
그의 작품은 1900년대 초까지 잊혀져왔고
1920년대에 이르러 그가 없었다면 렘브란트도 없었다면서 재평가에 들어가
지금에서는 그의 인생은 몰라도 그의 작품만이라면 미술역사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