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주변 어른들을 보며 한번쯤은 이런 의문이 들었을것이다
"어떻게 어른들은 전부다 결혼을 했을까?"
분명 20세기 군사정권 시절에도 성격이 너무 찐따같거나
너무 못생겼거나 너무 돈이 없거나하는 이유로
결혼하기 힘든 남자가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을 보면 결혼못한 사람이 아예 존재 하지 않는다.
미스테리다.
한국은 극심한 남아선호 사회라, 옛날에도 성비가 불균형했다. 지금 50대도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다. 그런데 50대 이상 세대에서, 결혼못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대한민국이 특별히 여성을 많이 낳는 나라가 아님에도, 결혼못한 기성세대 중년남성은 정말 보기힘들다.
그시절 결혼못하고 도태된 남자들은 다 어디간것일까?
전부다 자살했다.
34세 농촌총각 장가못가 자살 (1989년)
보름동안 노총각 20명 무더기 자살 (1989년)
결혼못한 34세 노총각 자살 (1990년)
28세 노총각 결혼못해 자살 (1984년)
결혼을 못했다는 현실을 비관해
36세 노총각 농약으로 자살 (1990년)
맞선 퇴짜맞은 30세 농촌총각 투신자살 (1993년)
42세 노총각 목메달아 자살 (2003년)
불과 90년대 군사정권 시절만해도 30넘어서 결혼을 못하면 인간대접을 못받았다.
심지어 노총각이라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남자도 있었다
그래서 도태된 남성들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것이다. 주변에 결혼못한 어른들이없는것은 이런이유다
사람들이 잘 간과하는 사실중에 하나가 원래 대한민국에서 국제결혼은 불법이었다는것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화교와 일본인에 대한 경제권 제한정책과 함께 국제결혼은 전면불법화 되었다.
혹여나 하게될경우 결혼한 배우자의 국가로 이민하는 조건으로 출국을 허용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있지 않던시기라 나라의 허락없이 외국에 나갈수 없었다.)
1991년 국제결혼 합법화를 요구하는 노총각들
물론 군사정권은 이런 짝짓기 경쟁에서 밀려난 남성들의 아우성 따위를
봐줄 생각이 단 1도 없었고
공권력을 동원해 살벌하게 유혈진압했다.
그리고 이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러한 도태된 남성들의 사이에 빠르게 침투해 크게 세력을 불리기 시작한것이
이른바 훗날 민I주노동당계보로 불리게 될 종북세력이었다.
적어도 70,80년대 진보세력의 주력지지기반이 농민이 된것의 시초는 여기서부터다.
우리가 알고있는 각종 농민회, 농촌기반 전문시위단체가 생겨난 이유또한 이러한 농촌총각들을 기반으로 성장해왔기 때문.
이러한 기조는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이 산업화 되며 농민보다 산업노동자가 더 큰 경제적/사회적인 영향력이 더 커지자
90년대 이후 급진좌파세력의 기반이 민I주노총을 필두로한 농민회->노동계로 옮겨간다.
이들이 먼 훗날 통합진보당의 직계조상이 됨.
또 하나 더 재미있는것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선전하고자 노력했던것이 바로 "중국동포"라는 단어 였다.
진영대립이 극심하던 냉전시기 공산국가이던 중화인민공화국에 살고있던 조선족을
농촌총각의 결혼문제 해결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하여 한국에 데려오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한이 풀리며 엄청난 스노우볼이 구르게 된다.
물론 이후엔 알다시피 이러한 짝짓기경쟁에서 밀려난 도태남성 말려죽이기 정책은
군사정권이 붕괴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동남아 매매혼이 합법화되며 사라지게된다.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