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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골 군수 정도가 꿈이였던 김일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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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분석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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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현은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현으로,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를 경계로 북한 바로 북쪽에 위치해 있다.


중국의 현급행정구(县级行政区)는 지급의 아래에 설치되는 행정구역이다. 현급은 한국의 지방의 시군급으로 볼 수 있다.


중국 공산당 동북 항일연군 2군 6사 정위(대위) 시절 김일성



연변에 항일연군 2군 6사에서 김일성과 한솥밥을 정말 오래 먹었던 여영준이란 투사가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가지 않고 고향인 연변에 남은 투사들도 많은데, 여영준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1990년대 초반까지 연변에서 살면서 회고록도 남겼습니다.


그런 여영준이 김일성 전기를 쓰기 위해 찾아간 작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장즈인지, 내두산인지 장소가 잘 생각나진 않는데 한번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김 정위(대위), 우리가 이렇게 먹을 것도 못 먹고 입을 것도 못 입으면서 일제와 싸우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언젠가 왜놈을 다 몰아내고 해방이 되면 공산당에서 우리한테 무엇을 시킬까요?"


그랬더니 김일성이 이렇게 대답하더라.


"나는 안도 사람이고 안도에서 많이 활동해 왔는데 최소한 안도현장 쯤이야 시켜주겠지."


그래서 우리 몇은 김일성의 주변에 모여 앉아 너는 김 정위 밑에서 안도현의 공안국장을 하고 나는 안도현의 위수사령관을 하마, 하고 말장난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까지 김일성도 북조선에 돌아가 이렇게 한 개 나라를 세울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때까지 항일연군의 꿈은 소박했습니다. 김일성조차도 일제를 몰아내면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서 안도현장 정도 시켜줄 것을 바라며 살았으니까요.



김일성은 이 당시에도 항일운동으로 출세를 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었으나 중국인이 된다하더라도 중국 공산당의 눈에 들어서 중국의 안도현장 자리를 얻는 정도를 원했지 아예 북한의 국가수반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1942년, 관동군의 토벌로 동북 항일연군이 붕괴하면서 망명하게 된 소련에서 창설된 88여단에 들어간 것이 출세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된다.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김일성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국제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88여단은 1942년 대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스탈린의 지시로 창설된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 부대원의 상당수는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수년간 만주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만주국 군대의 대대적인 소탕 작전으로 부대가 궤멸 상태에 빠지자, 소련으로 투항한 중국인과 조선인 빨치산 출신이었다.)


이때 김일성은 "특별 면접을 위해 즉각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가라"는 돌연한 명령을 받았다.


1945년 9월 초, 하바롭스크 주둔 소련 극동군 제2방면군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과 군사위원 시킨 상장은 제88보병여단(88여단) 제1대대장 진지첸 대위를 호출했다.


진지첸은 김일성의 중국 발음 ‘진즈어청’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이름이었다. 진지첸은 소련의 대일전(對日戰)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8월 말 푸르카예프 대장에게 ‘붉은 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당시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와 군사위원 슈킨을 면접했는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소련군 통역관은 후일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고 나에게 말했다.


김일성에게는 질문에 답변만 하도록 허락되었는데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대위 진지첸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푸르카예프 사령관은 진지첸에게 자리를 권한 후 질문을 시작했다.


“당신은 조선인인가?” “예.”


“공산당원인가?” “예, 그렇습니다.”


“당신은 붉은 군대에서 계속 근무하길 원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가족이 있나?" "결혼했으며, 아들이 한명 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조선에 일하러 가라고 제안한다면?” “세계 혁명 과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이면 항상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킨 상장은 “좋아, 아주 훌륭한 대답이였소.”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두 장군은 이어 몇가지 경력을 물은 후 김일성에게 "최고 소비에트의 결정에 따라 조선인 전문가들이 조선에 보내지고 있다. 현재 조선은 새 조국을 건설할 전사들이 필요하다. 귀관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특별임무를 받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이같은 발언은 김일성이 이미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과 전쟁의 종결 며칠 전에 우리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내에서 조선의 지도자를 맡을 인물을 찾으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 결정을 준비한 사람이 베리야였던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스탈린에게 후보자를 찾는 것을 중앙정보부(KGB)가 하게 해달라고 설득하며, 자기의 부하들에게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물론 후보자 김일성은 내무인민위원회쪽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야만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모든 가능한 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일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육군대위 진치첸에 대한 정치적 서류가 공산주의 조선의 미래 리더역에 후보자들 중의 하나로 그를 선택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특히 김일성이 45년 9월 중순 조선의 지도자로 선발되기 위한 면접을 하기 직전 심사위원격인 극동군 전선사령관 푸르가예프 상급대장과 동 군사위원 슈킨 대장 앞으로 제출된 김일성의 인물평가서에는


"대위 진지첸, 동만주에서 빨치산활동 참가, 하바로프스크 군사학교에서 특수과정 수료, 사령부로부터 "붉은 기 표창"을 수여받음, 42년 입대, 현재 대대장" 등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를 훑어본 베리야는 ‘좋다’ 라고 했다. 


베리야가 찾은 진지첸 대위가 바로 일의 적임자라고 대원수(스탈린)에게 아뢰고, 칭찬을 받았다.



진지첸을 모스크바로 보내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바실레프스키 사령관은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있는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켜놓고 88여단의 진지첸 대위를 불러온 후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모스크바로 안내토록 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일성은 스탈린의 전용 별장으로 직행, 그곳에서 한참동안 대기하다 스탈린의 면접시험을 받은 것이지요.


스탈린은 극동군과 KGB 극동본부에서 올린 김일성에 대한 평정서를 검토한 후 평정서 내용대로 조목조목 질문을 하더라는 겁니다.


간단한 식사를 곁들인 이 면접은 4시간 동안 진행됐습니다.


소련군 대위 견장을 단 김일성은 자리가 자리인만큼 너무 긴장해 "예" "예" 만 연발할 뿐 한마디도 못했다고 훗날 중앙당에서 이 자리에 배석했던 고위 간부에게 들었습니다.


스탈린의 김일성 면담에 앞서 1945년 8월 말 모스크바 소련공산당에서 하바로프스크의 극동군 총사령부에 ‘북조선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해 빨리 지도자를 찾아 보고하라’는 지령이 떨어졌고, 지령은 다시 평양의 제25군 사령부에도 하달됐습니다.


평양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부는 ‘공산당원이 지도자가 돼야 순리이지만 북조선에 들어와 보니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서울에 있고 북조선에는 믿을 만한 공산당원이 없다’고 극동 사령부에 보고했습니다.


결국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국가공안부(KGB) 총국은 북한에 주둔한 정보 장교들의 보고와 메크레르 중좌의 제88정찰여단 조사보고서 등을 종합한 결과, 김일성이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보고를 모스크바 소련공산당에 올렸습니다.


결국 이 보고가 스탈린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다녀온 후 극동군과 하바로프스크의 정보기관 등 일각에서는 준비된 공산당원인 박헌영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당시 미국이 미국에 살고 있는 이'승'만을 데리고 남한에 들어갈 것이라는 현지 정보에 따라 우리도 소련에 살고 있는 허가이 남일 박창옥 등 고려인 출신들을 지도자 후보로 데리고 들어가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처음부터 김일성을 낙점했고, 한번 결정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최고사령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코바렌코 인터뷰/김국후, 74-75쪽)


군중대회를 앞두고 레베데프 소장은 김일성에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소련을 싫어하는 분위기가 감지되니 굳이 소련 훈장을 달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김일성은 기어이 소련 훈장을 달고 연단 위에 올랐다.


레베데프는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려는 소영웅 심리의 발현”이라 보았다.


소련기와 태극기 앞에 치스차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장군이 서 있고 그 앞에 소련 훈장을 단 김일성이 연설하는 이날 사진은 북한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훈장을 지운 채 김일성 혼자 연설하는 사진으로 편집돼 사용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처음 대중들 앞에 나선 날의 사진. 좌로부터 강미하일 소련군 소좌 (고려인), 소련 적기 훈장을 단 김일성(1912~1994), 김일성의 적기 훈장을 만져보는 Grigory Konovich Mekler(1909~2006) 소련군 중좌. 중좌는 이날 집회의 사회를 맡았다.


이런 잔챙이 새끼가 중공에서 소련으로 줄 갈아타고선 소련군 대위 나부랭이가 북조선 왕이 되고 3대 세습 개지랄염병을 떨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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