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밥(흰쌀밥)에 고깃국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등 최근 제기되고 있는
조선시대 우리 조상님들이 소고기를 풍족하게 즐기셨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주로 사용되는 문헌 자료는 바로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조선 숙종 2년(1676년) 당시 소고기 섭취량이 무려 하루에 1000마리가 넘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1200만으로 추정되므로, 한우 한 마리에서 200kg이 나온다고 가정하여 연간으로 추산하여 인구수로 나누면
연간 소고기 섭취량은 6kg가 넘어가며,
이는 현대의 12.7kg에는 못 미치지만 1980년대의 6.3kg와 비슷한 수치이다ㄷㄷ
물론 이러한 계산은 대략적인 것이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실제로 평시에도 이밥에 고깃국을 즐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소고기를 많이 섭취했던 건 사실이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기는 힘들다고 보며,
하루에 소 1000마리이라는 숫자 자체는 과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물리적으로 말이 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총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조선시대 가장 참혹했던 기근인 경신대기근이 끝난지 불과 5년 전이다.
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에 일어났으며, 이는 승정원일기가 기록된 1676년과는 불과 5년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참고로 당시 기근의 참혹함은
1671년 12월, 윤경교가 이 때까지의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한다고 보고하였으며,
현종의 처백부이기도 했던 병조판서 김좌명을 비롯한 재상급 인사들 역시 10명 이상 사망하는 등 사대부 지도층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여기서 소의 개체수 역시 급감하였다고 볼 수 있는것이,
구제역이 창궐하여 2만마리 이상의 소가 죽었다는 기록과 함께,
당시 조정에서도 워낙 기근이 심각한 나머지
전에는 원칙적?으론 금지했던 소의 도축 금지령을 폐지하고 소를 잡는 것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기에 이른다.
상식적으로 봐도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는데 소들도 농사짓는데 필수적인 개체를 제외하곤 멀쩡할 리가 없다...
2. 조선 내의 소들이 멸종한 뻔한지 불과 38년 전이다.
병자호란 1년전인 1638년, 구제역으로 인해 조선시대 소들이 멸종위기에 이르렀고,
이를 막기위해 수입을 해야 하는데 청나라는 팔지 않아
비변사 무장이었던 성익이 당시 돈이 없던 조정에서 내준 담배를 들고가서
청나라를 지나 저 멀리 몽골까지 가서 담배를 피지 않던 몽골인들에게 담배를 전파시켜 세일즈를 성공했고,
이렇게 몽골에서 데려온 181두를 바탕으로 평안도에서 종자 번식을 하여 개체수 회복에 성공하였다는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이야기ㅇㅇ
아무튼 이렇게 조선의 소가 멸종 위기에 이른게 불과 승정원일기가 쓰여진 1676년의 38년 전
소의 번식 주기는 다른 가축에 비해 긴 편이고, 당시 축산 시스템이 지금보다 미비했던 점, 조선의 육로 이동이 어려웠던 것 등 여러 요건을 고려하면
소의 개체수가 빠르게 회복한다고 해도 38년만에 하루에 1000마리를 잡을 정도의 여유가 생기긴 어렵다고 본다.
앞에서도 그렇고 현대에도 구제역이 해결되지 않아 몇년마다 한번씩 고생하는 거 보면
새삼 구제역이 소에게는 정말 무서운 전염병인 듯...
3. 근대 구한말의 실제 기록을 놓고보면 오히려 퇴보?
다음은 근대부터 현대까지의 연간 소의 사육두수 및 도축두수이다.
이 자료를 기준으로 1909년, 경술국치가 일어나기 1년전 구한말인데,
이때의 연간 도축두수는 약 16.7만. 하루로 따지면 457마리이다.
앞서 1676년 승정원일기의 하루 1000마리 이상을 신뢰한다면 전국의 도축두수는 대략 절반 이하로 감소한 셈...
심지어 당시 인구는 1700만으로 당연히 17세기 후반에 비해 증가했다.
일반 백성들의 실제 삶의 질이 별로 올라가지 않았던 걸 감안해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인구가 늘어나는 근대에 접어들어
대부분 케이스에서 도시 거주민들을 바탕으로 유통이 쉬운 고기 소비량이 증가했던 것을 생각하면
시대에 역행했다고 생각해도 소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승정원일기에서 이렇게 과장을 할 이유가 있을까를 추론해보자면...
앞서 1에서 말한 경신대기근이 워낙 참혹했고, 이때의 피해를 회복하는 단계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급감했던 소의 개체수를 회복하기 위해선 소의 무분별한 도축을 경계하고 터부시해야 했거나,
아니면 기근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음이 아니었을까? 라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추정됩니다.
물론 이는 필자의 가설, 즉 뇌피셜이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