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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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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침내 잉글랜드인들과 가스코뉴인들은 협상을 요청했고, 프랑스 국왕이 그들의 주권자이자 군주임을 인정하며, 앞으로 프랑스 왕실에 결코 반역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진실하고 순종적인 신민들로 남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이 협정은 1453년에 맺어졌다.

-장 샤르티에, 샤를 7세의 정복



1. 푸제르 습격 (1449)



1449년 3월 24일, 아라곤 출신 용병이자 가터 기사단원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요충지 푸제르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는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계획하고 헨리 6세가 승인한 작전이었다. 서퍽 공작은 브르타뉴 공국에서 질 드 브르타뉴가 가진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동시에 샤를 7세의 전쟁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브르타뉴 공작을 무력으로 압박해 질 드 브르타뉴를 석방시키면 브르타뉴 공국을 중립 세력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헨리 6세는 아마도 그저 친구를 구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푸제르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샤를 7세는 곧바로 루앙으로 사절을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서퍽 공작은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들며 잉글랜드 정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그리고 쉬리엔에게 직접 서신을 써서 만족감을 표현했다.


5월 중순, 프랑스군이 센강 하류의 요충지 퐁드라르슈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들은 스스로 브르타뉴 공작의 신하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정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들은 이어서 제르베루아와 콩슈를 점령했고, 같은 시기 브르타뉴 국경에서도 프랑스군이 모르탱을 공격해 점령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던바와 덤프리스를 불태웠다. 동시에 스코틀랜드군도 노섬벌랜드에 침입해 안윅과 워크워스를 불태우는 것으로 보복했다.


6월 15일, 루비에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대표들 간의 회담이 열렸다. 잉글랜드측은 푸제르 점령이 프랑수아 드 쉬리엔의 단독 행동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7월 4일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프랑스 대표단은 7월 25일까지 약탈에 대한 보상을 하고 푸제르를 떠나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낸다.




2. 베르뇌유 포위전 (1449)



1449년 7월 20일 프랑스군이 베르뇌유 시를 점령하고 성채를 포위 공격했다. 다음날 장 드 뒤누아가 수백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베르뇌유에 도착했고, 31일 휴전 종료와 전쟁의 재개가 공식적으로 선포되면서 노르망디에서의 군사작전의 전권을 위임받는다.


7월 31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1500여 명의 구원군이 베르뇌유 북쪽 10km에 있는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이에 뒤누아는 2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레퇴유로 향했다. 탈보트는 북쪽으로 후퇴했고, 아르쿠르 남쪽에서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하지만 탈보트는 야음을 틈타 다시 퇴각했다. 마침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이 지휘하는 또 다른 프랑스군이 루앙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탈보트는 루앙으로 귀한한다.


8월 4일, 루앙 기습에 실패한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은 센강을 건너 뒤누아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곧바로 리슬 강 하구의 요충지인 퐁 오데메르를 야간에 기습했지만 실패했고, 12일 다시 총공격을 가해 점령했다.


같은 시기, 루앙 성에서 서머싯 공작과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회의 끝에 야전을 포기하고 노르망디의 주요 도시와 요새들로 흩어져 요충지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압도적인 숫자의 프랑스군에게 각개격파당할 뿐인 최악의 전략이었지만, 당장 농촌과 도시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8월 22일, 성채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베르뇌유가 완전히 점령되었다.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퐁레베크와 리시외의 주민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동부와 서부의 잉글랜드 주둔지가 서로 단절되었다.




3. 루앙 포위전 (1449)



1449년 8월 말, 샤를 7세가 직접 이끄는 1만 이상의 프랑스군이 루비에에 집결했다. 뒤누아가 센강 이남에서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동안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이 루앙으로의 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초,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몽생미셸에서 코탕탱 반도로 진군해 쿠탕스, 생로, 카랑탕, 발로뉴 등의 요충지를 2주 안에 모두 점령했다.


같은 시기, 알랑송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알랑송을 포위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잉글랜드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주둔군은 성채로 후퇴한 뒤 곧바로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9월 중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아르쿠르를 점령했다. 알랑송 공작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해 아르장탕과 엑슴을 점령했다. 알랑송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장탕의 주민들은 프랑스군이 도착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주둔군을 성채로 몰아냈다.


10월 9일, 프랑스군이 루앙을 포위했다. 주민들은 서머싯 공작에게 항복하라고 요청했지만 공작은 거부했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매수된 주민들의 도움으로 루앙 동쪽 성문을 기습했지만 탈보트의 빠른 대응으로 실패했다.


10월 17일 아침, 루앙의 주민들은 회의 끝에 루앙 대주교 라울 루셀을 중심으로 유력 시민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곧바로 서머싯 공작을 찾아가 항복을 요청하며, 시민군 1000명이 무기를 들고 봉기할 준비를 마쳤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머싯 공작은 시간을 벌기 위해 프랑스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한다.


10월 18일, 협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 장 드 뒤누아는 루앙 주민들에 대한 사면과 도시 특권 보장, 잉글랜드 주둔군의 안전한 퇴각을 약속하며 이틀의 시간을 주었다. 이 소식에 루앙 주민들은 환호했고, 주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한 잉글랜드군은 성채로 후퇴할 준비를 미리 시작했다.


10월 19일 아침, 루앙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도시 성문을 열고 잉글랜드군을 성채와 방어탑으로 몰아냈다.


10월 20일 아침, 서머싯 공작은 뒤누아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제안했던 조건에 따라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알랑송 공작은 잉글랜드군이 답변하기 전에 루앙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으니 약속은 무효가 되었다며 거부했다.


10월 23일, 서머싯 공작은 뒤누아와 재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서머싯은 꼬드벡, 탕카르빌, 옹플뢰르, 아르크, 몽티비예 등 센강 하구의 요충지를 대부분 양도하고, 주둔군의 몸값으로 5만 살뤼(8300파운드)를 1년 안에 지불하며 그동안 존 탈보트와 헨리 레드퍼드 등 저명한 지휘관 8명을 인질로 보낸다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에 동의한다.


같은 시기, 르 크로투아의 주둔군은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르고뉴 공작에게 항복했다. 롱니 성의 주둔군은 프랑스군에 항복했고, 쥐소르의 지휘관인 리처드 머버리 경은 포로로 잡힌 아들의 석방과 노르망디인인 아내의 재산권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프랑스에 귀화했으며 훗날 트루아의 바이이로 임명된다.


11월 5일, 이 모든 일의 시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1만 에퀴와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에게 항복했다.


12월 8일,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센강 하구의 마지막 요충지 아르플뢰르를 포위하고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아르플뢰르 주둔군과 수비대장 토머스 에버링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2주 만에 항복한다.




4. 발로뉴 포위전 (1450)



1450년 1월 26일,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의회에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당한 법 절차와 정부 절차를 방해하거나 매수한 것이었다.


2월 18일, 서머싯 공작의 항복 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에 저항하던 옹플뢰르의 주둔군이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전역에서 잉글랜드가 보유한 항구는 코탕탱 반도의 셰르부르 하나만 남게 되었다.


3월 15일, 토머스 키리엘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지원군 3000명이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그의 임무는 캉으로 가서 서머싯 공작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리엘은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인 셰르부르를 지키기 위해 셰르부르의 방어에 필수적인 요충지인 발로뉴를 먼저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머싯 공작은 각개격파 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캉, 바이외, 비르의 주둔군 2000여 명을 매튜 고프의 지휘하에 발로뉴로 파견한다.


3월 17일, 서퍽 공작을 죽이라는 하원의 요구에 따르고 싶지 않았던 헨리 6세와 귀족들의 거부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끝에, 공작은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영주들이 모인 웨스트민스터궁의 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공작은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헨리 6세는 첫 번째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두 번째 혐의에 대한 처벌로 그해 5월 1일을 기준으로 5년 동안 공작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그날 밤 공작은 이전까지 구금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궁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났다. 헨리 6세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작이 분노한 런던 시민들의 보복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의 폭도들이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그를 추격했고, 그곳에서도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붙잡히고 약탈당했다.




5. 포미니 전투 (1450)



1450년 4월 10일, 키리엘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발로뉴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틀 뒤 서머싯 공작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4월 14일, 클레르몽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분견대가 비르 강을 건너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그날 오후, 리슈몽이 지휘하는 또다른 프랑스군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토머스 키리엘과 매튜 고프는 행군을 멈추고 포미니 마을에 진을 쳤다.


4월 15일 아침, 클레르몽 백작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은 다음 리슈몽을 기다리면서 정오까지 대치를 유지했다. 정오 무렵 리슈몽의 군대가 남쪽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본 클레르몽 백작은 대포 사격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매튜 고프는 궁수 500명과 소수의 맨앳암즈를 보내 포대를 점령하고 대포들을 탈취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전열 정비를 마친 리슈몽의 군대가 남쪽에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포미니 마을로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피에르 드 브레제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격해 대포들을 되찾았다. 동시에 리슈몽이 보낸 중기병대가 전열을 돌파하고 르 발 다리를 점령해 잉글랜드군의 전위와 후위를 단절시켰다.


곧이어 궁수들과 하마한 맨앳암즈들이 도보로 진격해오자 잉글랜드군의 전열은 단 몇 분만에 무너졌다. 매튜 고프는 수백 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말을 타고 탈출했지만 나머지 잉글랜드군은 포위당한 채 전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6. 서퍽 공작 납치 살해 (1450)



1450년 4월 30일, 서퍽 공작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쓴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공작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공작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작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배에 올랐지만, 니콜라스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체포했고, 모의 재판 끝에 공작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다음 날인 5월 2일, 서퍽 공작은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 후 서퍽 공작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 말뚝 위에 전시되었다. 그의 하인들은 무사히 해안으로 옮겨졌지만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켄트의 셰리프는 곧 이 살인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알게되었고, 즉시 런던으로 소식을 전했다.


5월 16일,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바이외의 주둔군이 항복했다.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주민들과 잉글랜드인 수백 명은 옷과 개인 물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잉글랜드로 추방당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군이 아브랑슈를 점령했다. 이후 생소뵈르와 브리케백의 주둔군은 브르타뉴군이 진군해오자 곧바로 항복한다.




7. 잭 케이드의 난 (1450)



1450년 6월 초, 켄트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의 지도자는 잭 케이드라는 인물로, '존 모티머'라는 가명을 쓰고 스스로를 '켄트의 대장'이라고 불렀다.


6월 11일, 수천 명의 반란군이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봉기에 참여한 전직 군인들의 조언에 따라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며 진영을 구축했다. 주교들과 런던 시 유력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진영을 방문하자, 케이드는 메인과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아넘긴 서퍽 공작의 당파를 정부에서 모두 해임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이들을 재판에 회부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역자 서퍽 공작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 우리의 주권자로부터 추방된 고귀하고 강력한 왕족 요크 공작'을 국왕의 고문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18일, 헨리 6세는 포병대가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반란군의 주장에 동조하며 진압을 거부하자 겁을 먹은 왕과 귀족들은 케닐워스 성으로 도망쳤다. 이후 반란은 잉글랜드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윌트셔에서는 솔즈베리 주교가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6월 30일, 캉의 주둔군이 약 한 달 간의 포위공격 끝에 항복했다. 바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주민들과 잉글랜드인들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추방되었다.


같은 시기, 니콜라스호의 선원 리처드 레너드와 토머스 스미스가 서퍽 공작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턴브리지에서 기소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서퍽 공작 납치와 살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으며, 레너드는 사형을 집행한 당사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무시하고 조롱한 혐의와, 헨리 6세가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반역자를 처벌하지 못했다고 비난한 혐의로 반역죄로도 기소되었다.


서퍽 공작이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보여주었을 때 선원들은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대배심에서 기소장이 승인되었고, 스미스와 레너드는 자신들이 왕국을 위해 헌신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다음날인 7월 1일, 스미스에게 턴브리지에서 재판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후 국왕법정 기록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그 이상의 추가적인 절차들을 다룬 내용을 찾을 수 없다.


7월 3일, 잭 케이드와 반란군이 런던에 입성했다. 반란군은 길드홀을 점거한 뒤 보퍼트와 서퍽 공작의 파벌을 대상으로 한 모의 재판을 벌였다.


7월 5일 저녁, 반란군이 안전하게 밤을 보내기 위해 사우스워크에 구축된 진영으로 철수한 사이, 런던 시의 유력자들이 이끄는 자경대가 왕실 군대와 힘을 합쳐 런던 다리를 탈환했다. 이후 반란군은 국왕의 사면 약속을 믿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잭 케이드의 사면은 가명으로 발급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케이드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7월 21일,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팔레즈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8월 초, 동프롱 주둔군이 항복했다.


8월 12일, 셰르부르의 수비대장 토머스 가워는 포로로 잡힌 아들을 석방하고 잉글랜드인들이 모든 재산을 팔거나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에서 모든 주요 거점을 상실했다.




8. 블랑크포르 전투 (1450)



1450년 9월 초, 샤를 7세는 투르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해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당장 가스코뉴로 대규모 군대를 끌고 갔다가는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노르망디를 공격해서 교두보를 마련할 수도 있으니, 가스코뉴 북부의 방비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3000명 정도의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9월 중순, 프랑스군이 도르도뉴강의 수운을 통제하는 요충지 베르주락을 포위했다. 하지만 포대를 구축하자 마자 방어군이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장삭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진격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무방비 상태인 거점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11월 1일, 알브레 영주의 어린 아들 아르노가 지휘하는 500여 명의 프랑스군 분견대가 바자를 점령한 뒤 가론강을 따라 보르도 인근까지 진격했다. 이에 보르도 시장인 가디퍼 숏호즈가 수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출격했지만 참패했고, 전투에서 귀환한 패잔병들과 전사자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도시에 공황을 퍼트렸다. 이후 아르노는 샤를 7세에게 군사 1000명만 더 있으면 가스코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9. 보르도 포위전 (1451)



보퍼트 파벌과 요크 공작의 대립은 과거 발루아 왕조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오를레앙-아르마냑 파벌과 부르고뉴 파벌의 대립을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국왕은 정신 질환으로 무력한 상태이며, 한 파벌은 정부를 장악했지만 군사적 실패로 불명예를 안은 반면 다른 파벌은 중앙 권력에서 소외됐지만 군사적 성공과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는 순교자로서의 이미지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저지른 실수마저 부르고뉴의 용맹공 장과 똑같았다.


1451년 1월, 요크 공작의 가신인 스티븐 크리스마스는 헨리 6세가 잭 케이드의 난의 복수로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를 계기로 켄트에서 또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서머싯 공작과 존 탈보트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이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수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요크 공작에게 지지를 표했었지만 반년 만에 일어난 두 번째 민중 봉기는 젠트리와 도시 유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요크 파벌은 계급 투쟁으로 분열되었다.


4월 28일, 장 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몽귀용을 포위했다. 일주일 뒤 주둔군이 성을 버리고 탈출했다.


5월 15일, 뒤누아는 계속 진격해, 블레 인근에서 미리 도착해 있었던 앙주의 샤를과 합류했다. 동시에 프랑스 함대가 도착해 잉글랜드 함대를 격퇴하고 해안을 봉쇄했다.


5월 22일, 블레의 도시 성벽은 일주일 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무너졌다. 그날 밤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해 도시를 점령했고, 주둔군은 성채로 후퇴한 뒤 다음날 아침 항복한다.


5월 말, 45년 전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좌절시켰던 부르 시는 포대가 설치된 것을 보고 바로 항복했다. 뒤누아는 부르에 지휘본부를 세운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리부른과 생테밀리옹을 점령한다.


같은 시기, 가론 강변에서는 아르마냑 백작이 뒤라와 소베르트를 점령한 뒤 생마케르와 뤼용을 포위했다. 가스코뉴 남부에서는 푸아 백작과 알브레 영주가 닥스를 포위했다.


6월 12일, 저항 의지를 잃은 보르도 주민들이 뒤누아 백작에게 항복했다.


8월 6일, 포병대가 포함된 프랑스군 5000여 명이 바욘을 포위했다.


8월 20일, 결국 바욘 시가 항복하면서 가스코뉴 전체가 정복되었다.




10. 보르도 습격 (1452)



1452년 2월,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서머싯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서퍽 공작을 처형하고 요크 공작을 정부로 보내라며 열광하던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였다.


3월 초, 켄트에서 지지세력을 모으고 돌아온 요크 공작이 웰링에서 국왕군과 대치했다. 협상장에서 요크 공작은 서머싯 공작이 최근 칼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것을 거론하며, 서머싯의 진짜 목적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파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이 기대했던 것 만큼의 호응은 없었고, 오히려 공작 자신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굴욕적인 공개 선서를 한 다음 사면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5월에는 프랑스의 동맹인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샤를 7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요크 공작이 심판의 날처럼 예언해 온 프랑스의 칼레 침공 위협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10월 20일,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4000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보르도 북쪽의 메독 해안에 상륙했다. 근처에 머물고 있던 클레르몽 백작은 급히 강을 건너 부르로 도망쳤다.


10월 21일 밤, 잉글랜드군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보르도를 탈환했다.


10월 25일,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가론 강을 따라 진격해 11월 4일까지 뤼용, 생마케르, 렁공을 탈환했다.


12월, 저베이스 클린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분견대 400여 명이 도르도뉴 강을 따라 진격해 리부른, 생테밀리용, 카스티용을 탈환했다.




11. 카스티용 전투 (1453)



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아들인 리슬 자작 존이 지휘하는 지원군 2400명이 보르도에 도착했다.


6월 초, 프랑스군 원수 앙드레 드 라발과 필리프 드 퀼랑이 지휘하는 7000여 명이 도르도뉴 강에서, 푸아 백작과 아르마냑 백작이 이끄는 3000명이 남쪽에서, 클레르몽 백작의 2000명이 메독에서 가스코뉴 침공을 개시했다. 동시에 프랑스 함대가 지롱드를 봉쇄하기 위해 라 로셸에 집결했다.


6월 21일, 탈보트가 메독에서 클레르몽 백작의 군대와 대치했지만 곧 전투를 포기하고 보르도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7월 14일, 클레르몽 백작과 푸아 백작의 군대가 카스텔노 드 메독 성을 포위했다. 같은 날 앙드레 드 라발과 필리프 드 퀼랑의 군대는 도르도뉴 강의 요충지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7월 16일 아침,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7000여 명이 카스티용의 포위를 풀기 위해 진군했다. 탈보트는 그날 밤 카스티용 포위군 진영으로 정찰병을 보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포위군 진영이 이미 참호와 목책으로 철저히 요새화돼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7월 17일 아침,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용에 도착했다. 이를 본 프랑스 병사들이 목책 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건조한 날씨에 피어오른 먼지가 시야를 제한했다. 기병 1000기를 직접 이끌고 도망치는 프랑스인들을 추격하던 탈보트는 목책 바로 앞까지 와서야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탈보트의 부관인 토머스 에버링엄은 후퇴해서 보병대와 합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기습의 이점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탈보트는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잉글랜드 기병들은 말에서 내린 뒤 야전 요새의 입구로 진격했다. 한 시간 동안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브르타뉴 기병 300기가 출격해 후방을 치자 잉글랜드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탈보트 자신과 아들인 리슬 자작이 혼전 도중 전사했다.




12. 보르도 포위전 (1453)



7월 20일, 사흘 동안 계속된 포격 끝에 카스티용 주둔군이 항복했다. 리부른과 생테밀리옹의 주둔군은 카스티용 전투의 결과를 듣고 보르도로 후퇴했고, 카스텔노 드 메독의 주둔군은 클레르몽 백작에게 항복했다.


이후 클레르몽 백작의 군대가 블랑크포르를, 라발과 퀼랑의 군대가 프롱삭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푸아 백작은 생마케르, 렁공, 빌랑도를 차례대로 점령한 뒤 카딜락을 포위했다. 앙굴렘에 머무르고 있었던 샤를 7세도 보르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편 보르도 삼부회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수비대장 로저 카모이스 경을 가스코뉴 총독으로 선출했다.


8월 1일,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포위했다.


9월 28일, 치열한 전투 끝에 카딜락이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생존한 주둔군은 모두 포로로 잡혔고 수비대장은 즉시 처형되었다.


10월 19일, 반란 주동자 20명을 제외한 모든 주민의 반역죄가 사면되며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는 가스코뉴인들은 망명이 허용되는 조건으로 결국 보르도 시가 항복했다.


다음날인 10월 20일, 보르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잉글랜드의 마지막 거점인 뤼용과 블랑크포르의 주둔군이 항복했다. 116년 전 프랑스 왕이 가스코뉴 영지 몰수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프랑스군에 의해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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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용병시대의 서막 (1360~1366)
카스티야 내전 (1366~1369)
프랑스의 반격 (1369~1375)
아서 왕의 죽음 (1375~1379)
북부 도시들의 반란 (1379~1385)
금성의 기사들 (1386~1389)

부르주 왕국 (1423-1428)

오를레앙의 처녀 (1429-1431)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7-1448)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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