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더드를 아십니까?
문붕이라면 플래티넘의 개더드라는 펜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배럴 중간에 박힌 금색 링, 그리고 배럴에 가득한 저 자글자글한 주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있지만, 한 번이라도 봤다면 뇌리에서 잊기 힘든 특유의 디자인을 가진 이 펜은 나름대로 꽤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려 1954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 이미 오늘날 개더드의 원형이 되는 셀룰로이드-레버필러 펜이 플래티넘에서 만들어진 거죠.
대체 왜였을까요?
1-1. 찰스톤도 아십니까?
워터맨에서는 한때 찰스톤이라는 만년필을 만든 바 있습니다.
캡을 닫았을 때 닫힌..듯 만듯 한 오묘한 배럴의 곡선 디자인,
그리고 개더드와 마찬가지로 배럴 중간에 있는 금색 중결링과 홈들.
둘의 (호불호가 분명한) 독특한 디자인은 서로 꽤나 닮아있는데, 이건 우연이 아닙니다.
2. 공통의 조상
: 플래티넘 개더드, 그리고 워터맨의 찰스톤은 모두 이 펜을 공동의 아버지로 두고 있습니다.
1939년에 야심차게 출시된 워터맨의 신작, 바로 헌드레드 펜입니다.
3. 최초의 루사이트 만년필
: 헌드레드 펜이 출시되기 전 1920년대의 만년필 시장은 셀룰로이드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 셀룰로이드라는 재질이 엄청 불안한 물질이거든요.
툭하면 깨지고, 수축하고, 오래되면 결정화되어버리는 게 이놈의 셀룰입니다.
그러던 1936년, 듀퐁에서 루사이트라는 새로운 아크릴을 상업화하게 되는데요.
여러분이 아시는 그 루사이트 맞습니다. 대황카 51에도 채용돼서 지금까지도 훌륭한 내구성과 안정성을 자랑하는 그 인자강 재질 루사이트.
놀랍게도 그 루사이트를 처음 펜에 사용한 회사가 워터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1940년대가 될 때까지 피드에 콤을 파놓을 생각은 안하는 그 워터맨이
이 신재료만큼은 유레카아저씨마냥 빠르게 도입을 해서
개복치 셀룰로이드에서 벗어나 세계 최초로 루사이트를 채용한 만년필을 출시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이 백년펜입니다.
4. 디자인
: 당대 만년필들과 헌드레드 펜이 차별화되는 지점은 단지 재질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디자인이죠
워터맨은 당시의 유명한 산업디자이너 “John Vassos”에게 의뢰해 헌드레드 펜을 디자인합니다.
당시 워터맨이 펜 딜러들에게 보낸 서신에는 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선과 색에 능통한, 사람의 손에 맞는 도구의 디자인에 있어 미국 최고의 권위자’
이 표현이 정말 사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지하철 개찰구 등 실제로 산업디자인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임)
출시된 헌드레드 펜의 디자인은 실로 센세이셔널했습니다.
쉐퍼 밸런스가 쏘아올린 유선형 디자인 유행을, 어뢰형 바디와 유선형 캡으로서 반영해주었고
(쉐퍼의 유선형 빔 역사에 대해서는 아래 글을 참고)
미끄럼 방지와 함께 손의 열을 분산시킬 수 있는, 그 독특한 주름진 배럴디자인을 함께 선보인 것이죠
배럴 중간의 금속 링 디자인 역시, 무게밸런스를 조절해줌과 동시에 꽤나 독특한 포인트로 작용했습니다.
루사이트를 채택함으로써 반투명 한 배럴을 선보인 것 역시 하나의 승부수였을 겁니다.
이 모든 디자인적 요소는 개더드와 찰스톤 등에 승계되었고, 그러한 사실 자체가 이 펜이 만년필의 디자인 역사에 있어 적잖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100년의 개런티
: 백년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00년의 보증을 자랑했습니다. 선명히 남아있는(!) 보증서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쉐퍼의 라이프타임을 필두로 하여 시작된 당대 만년필회사들의 평생보증경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이 평생보증경쟁은 차후 미국 공정위 비슷한 기관을 통해,
“생긴지 70년도 안 된 니들이 100년보증을 장담하는건 무리 아니냐?”
(실제로 100년도 안 지난 지금 워터맨 꼬라지를 본다면..)
는 지적을 받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백년펜은 이후 이름을 Emblem으로 변경하게 됩니다.
6. 전쟁을 겪으며
: 초기에 루사이트로 만들어지던 백년펜은, 당시 세상이 피해갈 수 없었던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관련 재질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짐에 따라 1941년 크리스마스 이후로 다시금 셀룰로이드로 재질이 변경됩니다.
이게 백년펜 입장에서는 꽤나 큰 타격의 변화입니다. 인자강 루사이트를 아이덴티티로서 내세우던 펜이, 도로 인자약 재질인 셀룰로 돌아갔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실제로 후기형 백년펜의 경우 셀룰로이드의 고질병인 결정화나 크랙 등애 매우 쉽게 노출되어 있어서 온전한 상태의 물건을 구하기가 무척 힘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호박색 뒷꽁다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맛탱이가 가버릴 수밖에 없는 수준이죠
단순 재질뿐 아니라 후기형의 경우 뚜껑의 형태나 색깔 등에서도 초기형의 특징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백년펜을 구하신다면 이왕이면 루사이트 재질의 초기형을 구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7. 크기놀이
: 그 당시 만년필 회사들은 크기놀이에 진심이었습니다. 쉐퍼도 미니사이즈, 풀사이즈, 오버사이즈 이러고 있고, 파카도 데미, 메이저, 맥시마 등등
크기를 바꿔가며 라인업에 변화를 주는 데에 워터맨은 사실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백년펜을 출시하면서부터는 이 크기놀이에 참전합니다.
루사이트 백년펜은 크게 3개 사이즈로 구분됩니다.
1) 레이디스 : 배럴의 금속링이 없고 캡에 있는 게 특징, 쪼끄맘
2) 스탠다드 : 보통사이즈
3) 디럭스 : 배럴 뒷꽁무니에 금속 링이 하나 더 있는 게 특징, 큼
후기 셀룰로이드 버전부터는 레이디스, 스탠다드, 디럭스 간 디자인 차이는 거의 없고 크기 정도만 변경됩니다.
8. 득펜
: 이 유서깊은, 역사에 남을 펜의 초기 루사이트 버전 스탠다드 모델이 국내에 올라왔던데
무려 당시의 케이스랑 100년 보증의 보증서까지 완벽한 상태로 주워올 수 있었습니다.
상태도 뭐 진짜 새것마냥 개쩔던데 어째서인지(무쌩겼으니까) 아무도 안먹더라구요
좋은 일이죠 냠냠
추가짤은 다른 글로 찾아와보겠습니다
+) 이 글에 기록한 대부분의 정보는
리처드 바인더 아저씨의 이 글을 출처로 합니다.
원본에 더 풍부하고 자세한 정보가 많으니 관심있는 문붕이는 일독을 추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