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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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워드 스턴튼 편'을 먼저 읽고 이 글을 읽는 것을 강력히 권장함
메시와 호날두.
페이커와 쵸비.
테니스의 빅3.
"세계 최강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어쩌면 시대와 종목을 불문하고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팬들은 오늘도 인터넷에서 자신의 시간과, 명예와, 부모를 걸고, 끊임없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19세기의 체스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체스 세계 최강은 누구인가?"
체스 세계 챔피언이라는 공식 타이틀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체스 플레이어들은 계속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왔고,
그들의 입에서는 그간 이러한 이름들이 오르내려왔다.
18세기 체스 세계를 주름잡았던 프랑스의 필리도어,
파리 최강 생아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영국의 하워드 스턴튼,
1851 국제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독일의 아돌프 안데르센,
그리고 결정적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의 폴 모피.
폴 모피는 유럽을 방문해 안데르센을 비롯한 유명 체스선수들을 모두 압살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모피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현역 최강'의 자리는 다시 한동안 안데르센에게 돌아가는 듯했지만,
그 다음 "세계 최강"의 자리는, 과연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
체스계는 신세대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돌프 안데르센의 뒤를 이어 19세기 후반 "세계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고,
포지셔널 체스라는 새로운 체스의 대원칙을 정립하였으며,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타이틀을 만들어낸,
William Steinitz(1836-1900)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슈타이니츠는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 프라하의 게토에서 유복하지 못한 유대인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이마가 툭 튀어나온 통통한 땅딸보에 절름발이로,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살았는데, 눈만큼은 언제나 이글이글 불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수학과 체스에 제법 두각을 보였던 슈타이니츠는 성년이 되어 제국의 수도 빈(Wien)으로 유학을 떠나 빈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체스만 존나게 두다가, 1년만에 성적 불량으로 퇴학을 당하게 된다.
당시 빈은 중부유럽 체스의 메카.
학생이란 신분을 잃고 무직백수가 된 그였지만, 체스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며, 빈 체스 클럽에서 체스 실력을 키워나간다.
그는 당시 매우 공격적인 플레이로 '오스트리아의 모피'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빈 체스클럽 챔피언십에서 59년 3위, 60년 2위, 61년 1위를 차지하며, 중부유럽 체스 최강자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여전히 가난한 채로.
때는 1862년.
1851년 수정궁 세계박람회의 대성공에 힘입어, 영국은 다시 한번 세계박람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물론 영국 체스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수정궁 세계 박람회와 함께 개최됐던 최초의 1851 국제 체스 토너먼트와 마찬가지로,
영국 체스계는 국제대회의 개최를 위해,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체스 선수들을 초청한다.
슈타이니츠는, 빈 체스 클럽의 대표로 이 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결과는, 14명의 참가자 중 6위. 그리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우승자는 11년전과 동일하게, 독일의 아돌프 안데르센.
모피가 사라진 체스 세계의 최강은, 여전히 그였다.
슈타이니츠는 1862년의 대회가 끝난 뒤에도 런던에 남기를 택했다.
당대 런던은 전세계 체스의 중심지였고, 탄탄한 체스 플레이어층과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도시였다.
전문 체스 선수로 밥 벌어먹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면 런던은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한 선택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서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런던에서, 슈타이니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이방인이자 유대인, 그리고 전문 체스선수였다.
그리고 체스계는 여전히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워드 스턴튼은 셰익스피어 학자.
헨리 버드는 회계사.
아돌프 안데르센은 수학 교사.
존 오웬은 성직자.
그리고 슈타이니츠는 체스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반백수.
중산층들 사이에서 체스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 체스를 생업으로 삼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 당대인들의 눈에는 체스는 어디까지나 '취미', 체스를 직업으로 택한다는 것은 썩 바람직한 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체스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한 폴 모피도 이런 말을 남겼던 것처럼.
"체스를 둘 줄 아는 것은 신사의 소양이지만, 체스를 잘 두는 것은 인생을 낭비했다는 신호다."
그리고 사실, 유대인이고, 전문 체스 선수고, 이런 것들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슈타이니츠는 성격이 존나게 셌다. 도무지 논쟁을 피하지 않는 성격이라 살면서 무수한 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적 중에는, 똑같이 성격이 존나게 셌던 당대 런던 체스계의 지배자, 하워드 스턴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워드 스턴튼과 그의 친구들은 슈타이니츠를 끊임없이 공격했고, 슈타이니츠는 평생을 런던 체스계의 주변인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체스 선수만큼 능력주의적인 직업이 또 있을까.
체스는 순수한 개인전. 자기만 잘하면, 결국에는 실력을 증명해낼 기회가 온다.
그리고, 슈타이니츠는 증명해냈다.
(좌, 슈타이니츠. 우, 안데르센)
1866년, 아돌프 안데르센을 상대로 한 매치에서 8승 6패 0무로 승리.
같은 해, Henry Bird를 상대로 한 매치에서 7승 5패 5무로 승리.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와 함께 열린 국제 토너먼트에서 3위.
1870년, 바덴바덴 국제토너먼트 우승.
그는 이제 명실상부 세계 최강자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고,
심지어 1870-1871년 보불전쟁의 여파로, 프랑스와 독일과의 교류전까지도 잠시 어려워짐에 따라 런던에서는 슈타이니츠를 막을 사람이 정말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스턴튼 일파의 속은 타들어갔다.
'누가 저 새끼 좀 막아봐'라는 간절한 열망으로,
1872년, 세인트 조지 클럽은 해외로 눈을 돌려, 체스 유망주를 영국으로 초청해온다.
그가 바로 독일제국 출신의 유대인 체스선수, 요하네스 주커토르트(Johannes Zukertort)였다.
그는 아돌프 안데르센의 근무지인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대학을 다녔고, 덕분에 안데르센으로부터 체스를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안데르센의 제자였던 그가 안데르센을 뛰어넘었다는 소식에, 세인트 조지 클럽은 잽싸게 그를 슈타이니츠의 대항마로 낙점, 그와 슈타이니츠와의 매치를 주선한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허망하게 끝났다.
7승 1패 4무, 슈타이니츠의 압승. 그의 지위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1870년대, 이미 최강의 자리에 오른 슈타이니츠는 이전의 낭만주의 스타일을 버리고, 점차 새로운 기풍의 체스를 두기 시작한다.
앞선 위대한 플레이어들(특히 모피)의 기보를 깊이 연구한 끝에, 그는 당대의 낭만주의 체스가 공격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방어가 빈약해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체스에서 통용될 수 있는 일련의 원칙들을 발견해냈고,
폰 중앙 확보, 폰 구조 약점, 비숍쌍 이점 활용, 나이트 아웃포스트, IQP 등에 대한 선구적인 분석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 원칙들을 바탕으로 포지션 상의 사소한 이점을 축적하여, 준비를 마친 뒤에야 결정적 이득을 취하는, 소위 '포지셔널 체스'를 정립해낸 것이다.
그가 도입한 이러한 원칙들이 모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슈타이니츠는 그것들을 분석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플레이스타일로 정립했으며, 자신의 글을 통해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슈타이니츠는 현대 체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충분히 받을 만했다.
물론, 당대 낭만주의 메타로 체스를 두던 이들에게는 이것이 그냥 씹게이체스로 보였고,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그는 다시 한 번, 경기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체스를 증명해낸다.
1873년, 빈 국제박람회와 함께 열린 1873 국제 체스 토너먼트.
오스트리아 황제의 후원을 받았던 이 대회에서, 슈타이니츠는 자신의 새로운 플레이 원칙과 함께 다시 한 번 당당히 1위를 거머쥔다.
당시 2위는 영국인 중 최강의 선수로 불렸던 조셉 헨리 블랙번이었다.
그리고 3년 뒤, 1876년.
대회 1위·2위를 차지했던 슈타이니츠 - 블랙번 간의 매치가 성사되는데,
충격적인 7승 0무 0패의 결과가 나오고 만다.
갈드컵은 드디어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과연 그 누가, 슈타이니츠가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을 감히 부정할 수 있었을까?
아직 남아있었다. 단 한 명이.
요하네스 주커토르트가.
세인트 조지 클럽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주커토르트는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1877 라이프치히 토너먼트 3위.
1878 파리 체스 토너먼트 1위.
1881 베를린 체스 토너먼트 2위.
슈타이니츠가 저술에 집중하느라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않았던 1870년대 후반, 주커토르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목을 끌어모았다.
1882년 빈 토너먼트에서는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 모두가 출전했고, 슈타이니츠는 1위, 주커토르트는 4위를 차지했지만, 점수차는 1.5점차.
더블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진행된 해당 대회에서, 둘의 상대전적은 한 번은 무승부, 그리고 한 번은 주커토르트의 승리였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1년 뒤의 1883년의 런던 국제 토너먼트였다.
(당시 1883년 대회에 대한 체스 잡지 일러스트. 좌측 상단에 주커토르트 vs 슈타이니츠.)
더블 라운드 로빈 + 무승부시 재경기로 진행된 당시 대회에서,
주커토르트는 22승 4패 7무라는 괴물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2위였던 슈타이니츠는 19승 7패 7무.
더욱 엄청났던 것은, 대회의 마지막 3경기가 진행되기 전만 해도 주커토르트는 22승 1패였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1패는 슈타이니츠가 안겨준 것. (해당 대회에서 상대전적은 1승 1패)
장기화된 대회 일정으로 신체적 컨디션이 완전히 무너진 주커토르트는 마지막에 약한 상대들에게 연달아 3패를 했는데, 그러고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런던 체스계는 간만에 신이 나서 슈타이니츠를 신나게 물어뜯기 시작한다.
"슈타이니츠는 정말로 세계최강인가?" "주커토르트야말로 세계최강이 아닌가?"
동시기에,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 사이에서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슈타이니츠는 The Field라는 잡지에서 체스 칼럼 작가로, 주커토르트는 The Chess Monthly라는 잡지에서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슈타이니츠가 자신의 칼럼에서 주커토르트의 플레이를 자신의 포지셔널 플레이에 의거해 신랄하게 비판했고, 이에 The Chess Monthly가 맞대응 하면서,
인신공격까지 난무하는, 훗날 '잉크 전쟁'이라고 불리는 분쟁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세계 최강은 누구인가? 잉크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그 모든 결론을 내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슈타이니츠가 주커토르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합의문에는 이러한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
"a match at Chess for the Championship of the World."
1886년, 최초의 공식적인 세계 체스 챔피언십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체스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챔피언십 매치는 미국에서 개최되었다.
1883년 말, 런던에서의 끝없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슈타이니츠가 결국에 미국 이민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미국 시민권 받으면서 빌헬름Wilhelm 슈타이니츠에서 윌리엄William 슈타이니츠로 공식 개명.)
슈타이니츠는 당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영국에서 사는 것보다 미국에서 죽는 것이 낫다. 영국에서 이기는 것보다 미국에서 패배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니, 난 아직 죽을 생각도 없고, 패배할 생각도 없다."
첫 5경기는 뉴욕.
그 다음 4경기는 세인트루이스.
마지막 11경기는, 모피의 고향인 뉴올리언스, 모피가 초대 회장으로 있었던 뉴올리언스 체스 클럽에서 열렸다.
예상대로, 주커토르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슈타이니츠는 가장 첫 경기에서 승리를 차지했지만 연이은 네 경기에서 연달아 패배했다. 1승 4패.
10승을 먼저 따내는 쪽이 승리하는 규정에서, 이는 당연히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부진했던 슈타이니츠는 세인트루이스에서부터 흐름을 역전시켰고,
흐름을 잃은 주커토르트는 급속도로 무너져내렸다.
슈타이니츠의 승리, 공식적인 체스 세계 챔피언이 처음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종종 이 최초의 세계 챔피언십은 낭만주의 VS 고전주의라는 등식으로 멋들어지게 표현되곤 하는데, 사실 경기를 까고 보면 주커토르트는 그의 스승 안데르센 같은 순수한 낭만주의자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주커토르트는 뛰어난 체스선수였다. 주커토르트는 이미 슈타이니츠의 포지셔널 체스의 개념을 상당 부분 흡수하고, 또 활용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아직 슈타이니츠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을 뿐.
그리고, 두 선수 간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정신적인 지구력에 있었다.
당대의 체스 잡지, British Chess Magazine에는 이런 독자 코멘트가 달리기도 했다.
"You’ll see if Zukertort loses the first two or three games right off he will collapse altogether, but if Steinitz loses nine games off the reel he will play the tenth with just the same pertinacity with which he played the first. Steinitz never plays better than when fighting the uphill battle. Zukertort only shows his best when fortune smiles."
"만약 초반 두세 판에서 주커토르트가 진다면, 그는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슈타이니츠는 연속으로 아홉 판을 잃더라도 열 번째 판에서 첫 번째 판과 똑같은 끈기로 싸울 것입니다. 슈타이니츠는 힘든 싸움을 할 때 가장 잘 플레이합니다. 반면 주커토르트는 운이 좋을 때만 자신의 최고 실력을 보여줍니다."
슈타이니츠는 당대에도 널리 알려진 미친 정신력의 소유자로, 그는 토너먼트보다는 1:1 매치에서, 그리고 장기전에서 훨씬 더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부류의 선수였다.
반면, 주커토르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고, 평소 심장병을 앓고 있어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그가 압도적 1위를 차지했음에도 후반에는 완전히 무너져내렸던 1883년 대회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결코 장기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의사는 주커토르트에게 체스를 그만두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까지 경고를 했지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I know that, but play or no play, I must be, and am, prepared to be taken away at any time without a moment’s warning."
그의 말대로 주커토르트는 2년 뒤, 1888년 체스를 두던 중 뇌졸중으로 45세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좌 라스커, 우 슈타이니츠)
슈타이니츠는 이후 미하일 치고린, Isidor Gunsberg, 엠마누엘 라스커를 상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며 8년간 타이틀을 유지했으나, 라스커의 두 번째 챔피언십 도전에서 패배하여 챔피언 타이틀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남았다.
다음 세대의 최강자들인 지크베르크 타라쉬와 엠마누엘 라스커는 슈타이니츠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이들은 그의 체스 이론을 정교화하고 더욱 발전시켜 보급해나갔다.
종종 슈타이니츠가 챔피언 중에서 임팩트가 없는 편이라는 망언(?)이 종종 들리고는 하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는 슈타이니츠가 체스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아, 우리가 더 이상 슈타이니츠 이전의 체스를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명의 뛰어난 체스 플레이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론으로 체스의 메타 자체를 뒤엎어버린 이론가였다.
슈타이니츠가 가져다 준 충격을 정말로 느끼고자 한다면, 슈타이니츠의 게임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게임을 보는 것은 어떨까.
그 게임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과연 누가 그것을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의 유산.
1886년, 슈타이니츠와 주커토르트의 매치로 시작된 체스 세계 챔피언십은 올해로 138주년을 맞이한다.
2024년의 세계 최강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체스 팬들은 다시 한번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