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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경주 답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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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부터는 크게 계획이 없었음. 정확히는 구상한 것과 크게 다르게 움직여서 계획이 무용지물이었다고 봐도 무방함.

첫 행선지는 봉길리의 대왕암. 당초에 일출을 보기 위해 첫 일정으로 계획한 곳이었지만 일기예보상 구름이 가득해 큰 기대는 없었음.

150번 첫차를 타면 7시 40분경 대왕암에 도착할 수 있음. 겨울철이라면 일출을 보는 것이 가능함. 하지만 부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하는 날씨에 옷을 얇게 입고 와 빨리 감은사지로 이동했음.

황룡사의 대종이 잠겨 있을 대종천의 하구.

감은사지삼층석탑(과 그 위에 앉은 가마귀)

신라계 석탑의 문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 그 규모와 비례미, 그리고 위치선정까지, 모든 면에서 압도당하게 됨. 경주를 오는 것이 6번째이지만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임.

장중하지만 무겁지 않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이곳.

금당지. 용이 된 문무왕이 금당 아래로 들어와 왔다갔다하라고 지면으로부터 띄운 것으로 알려져 있음.

감은사지 방문을 즐겁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이 감포가도임. 넓은 평야는 아니지만 무한히 뻗은 듯한 환상을 주는 이 길은 버스로 방문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통일전에서 하차함.

서출지. 여기 도착할 때만 해도 동남산, 북남산 쪽을 거쳐 배반동 들판을 지나 낭산과 보문들, 그리고 소금강까지 연계해서 갈 생각이었으나 갑작스런 변심으로 정 반대 방향인 칠불암으로 길을 잡았음.


서출지에는 잘 알려진 전설이 있음. 삼국유사 기이 사금갑(射琴匣)조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서기 488년 비처마립간이 천천정으로 행차했을 때의 이야기임.

왕이 행차하자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쫓아가라 하였음. 괴이하게 여긴 왕이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쫓게 하였는데, 피촌(避村) 어느 못가에서 두 마리 돼지가 싸우고 있는 걸 보다가 정신이 팔려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음. 어쩔 줄 몰라하던 신하에게 홀연히 못 안에서 나타난 노인이 봉투를 건네주었으니 신하는 이것을 왕에게 바쳤음.

그 편지의 겉에는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당연히 한 사람이 죽을 것을 택하려는 왕에게 일관이 "두 사람이란 서민을 뜻하지만 한 사람은 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자 편지를 열어보았음. 편지에는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집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왕은 지체 없이 활로 쏘았음. 거문고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왕실의 분향을 받드는 중과 궁주(왕비)가 통정을 하던 중이었는데, 그 중은 왕을 해치기 위해 숨어 있던 것이었음. 왕은 둘 모두를 처형하였음.
이후로 노인이 나와(出) 편지(書)를 준 이 연못을 서출지라 부르게 되었음.

이후 서출지에는 1664년 임적(任勣)이 이요당(二樂堂)이란 정자를 지었음. 못 주위에는 해묵은 고목들이 둘러싸고 있고, 여름에는 연꽃과 배롱나무꽃이 만개하는 장관을 볼 수 있음.

한편, 사금갑 설화의 본 무대는 서출지가 아니라 그 옆의 양피지란 주장이 있음. 앞서 살펴본 설화에서 피촌은 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으로 남산 동록에 있다고 쓰여 있는데, 바로 인접한 남산리 동서삼층석탑 터가 바로 양피사지로 추정되기 때문임.

양피사지로 추정되는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일설에는 남산사(南山寺)라고도 전함.

전형적인 쌍탑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석가탑과 다보탑에 준하는 차이를 느낄 수 있음.

서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으로,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의 탑임. 상층기단에는 팔부중상을 새긴 흔한 양식임.

반면 동탑은 모전석탑으로, 전탑(벽돌탑)을 모방한 탑임. 층급받침뿐 아니라 낙수면도 계단식으로 파내려갔음. 기단부는 단층으로 직육면체 모양 화강암 8덩이를 깎아 만들었음.

경주지역에는 여러 기의 모전석탑들이 산재하는데, 이곳 외에도 서악동 삼층석탑, 지곡3사지 삼층석탑 등이 있음. 모전석탑에는 분황사석탑과 같이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게 잘라 전탑과 같이 세우는 양식이 있는가 하면 일반적인 석탑과 같이 하나의 큰 돌을 형태만 깎아 옥개석을 만드는 양식도 있는데, 분황사탑 외의 경주의 모전석탑들은 대체로 후자를 따르고 있음. 직육면체 블럭 형태로 깎은 기단 또한 공통적으로 나타남.

좀 더 이동하면 염불사지 동서삼층석탑이 나옴. 두 탑은 불국사 삼층석탑의 비례에 따르되 상층기단 면석 수가 3개로 석가탑 이전 양식도 나타나서 8세기의 석탑으로 추정됨.

염불사는 본래 피리사라 불렸는데, 피리사에는 이상한 중이 살았음. 이 중이 외는 아미타불 소리가 성 안까지 들렸으며 낭랑하고 한결같아 모두 그를 공경하여 이름을 염불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음.

염불사지 동탑의 초층 옥개석은 신부재로 교체하였음을 알 수 있음. 여기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우리 현대 역사를 되돌아볼 만한 사연이 있음.

불국사역 앞 로터리에는 오랜 세월 웬 삼층석탑 하나가 서 있었음. 구정동삼층석탑이라고 불리던 이 탑은 쓰러져 있던 염불사지 동탑 부재를 모아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순시를 기념해 불국사역 광장에 세운 것이었음.

그런데 문제는 초층 옥개석이 파손되어 쓸 수 없다는 점이었음. 애초에 불국사역 앞에 탑을 세운 것이 보여주기용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형태가 온전치 못한 탑은 의미가 없었음. 이 때 당국자들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불국사역 앞에 서 있던 구정동삼층석탑. 연합뉴스 사진)

도지동 이거사지에 위치한 이거사지삼층석탑의 부재였음. 이거사(移車寺)는 성덕왕릉 북쪽 동촌(東村)에 있던 사찰로, 태대각간 최유덕(崔有德)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유덕사라고도 불림.

결국 위와 같이 짬뽕 탑이 완성되었음. 하지만 오랜 시간 여론의 뭇매를 맞고, 1998년 염불사지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2008년 원위치로 이건되고, 초층 옥개석은 신부재로 교체되었음.

하지만 이거사지삼층석탑의 옥개석은 원위치로 돌아가지 못하였음. 아직도 염불사탑과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염불사지 한켠에 외롭게 남아있음. 이거사지는 현재 일부 정비가 진행되었으나 토지수용 등의 문제로 주민들과 마찰이 심해 복원까지는 시일이 걸릴 듯함. 그때가 되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함.

이와는 별개로 청와대 미남 석불좌상으로 흔히 불리는 보물 제1977호 경주 방형대좌 석불좌상의 원위치 또한 이거사지임. 조선총독을 위한 상납용으로 서울까지 올라가서 아직도 타향살이 중임.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절터가 아닌가 싶음.

참고로 "도지"동 이거사지라서 카카오맵 후기는 이모양임.

어쨌든 다시 출발해서 칠불암으로 향했음. 칠불암 가는 길은 경사가 적고 바위도 없어 쉽게 오를 수 있음. 애당초 등산 계획도 없이 대충 후드에 면바지 입고 찾은 내가 1시간 좀 안 걸려서 도착했으니 계획하고 온다면 40분 정도면 올 수 있지 않을까 싶음.

칠불암 도착. 앞의 마애불상군과 저 멀리 위의 신선대가 보임.

1시간만에 처음 만나는 탁 트인 경치. 협소한 공간이지만 있을 건 다 있음.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암벽에 새긴 삼존불과 그 앞 바위에 새긴 사방불로 총 7구를 새겼음.

전국에는 국보로 지정된 마애불이 7기 있음. 그 중 6번째 만남을 갖게 되었음. 6곳 중 가장 놀라웠던 만남은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여래좌상이었지만, 칠불암의 마애불상군은 전성기 통일신라의 미학을 그대로 담고 있음.

특히 좌우협시보살은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입상을 연상되는 은은한 미소와 유려한 조각이 인상적이었음. 물론 조각의 수준이 석굴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통일신라의 미학을 느끼게 해주는 훌륭한 작품임.

이외에도 칠불암에는 많은 탑재가 있음. 원래부터 있던 것도 있고, 인근에서 옮겨온 것도 있는데 규모가 상당하고 하나는 아니었을 듯함.

칠불암 뒤로 빡센 산길을 오르면 곧 신선암에 도착함. 신선암의 경치는 용장사지, 연화대좌와 함께 남산을 대표한다고 할 만함.

신선암에서 내려다본 칠불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으며..

신선암에서 바라본 경주 동쪽 평야.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과 산하.

멀리 보이는 국사곡4사지 삼층석탑. 사실 복장도 등산용이 아니고 생수 한 병 챙겨오지 않았기에 돌아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컸지만 갔던 길은 다시 가지 않는 성격이라 계속 진행하기로 했음.

이제 백운재까지 이동해서 용장골 방향으로 잠시 내려갔음. 남산에서 가장 깊은 곳인 이곳 고위봉 아래에는 산정호수가 있음.

산정호수에서 이정표를 따라 이동하면 지곡3사지 삼층석탑이 있음. 남산리 동삼층석탑과 같이 모전석탑 계열로, 형태가 상당히 유사함.

다시 백운재로 돌아갔음. 지도상으로는 고위봉을 무조건 거쳐서 틈수골로 내려가야 할 것 같지만, 백운재에서 백운암 방면으로 가면 고위봉까지 오르지 않아도 됨.

백운재까지는 임도가 나 있어 차량이 진입함. (일반차량은 진입불가)

천룡사지 일대는 고지대에 위치한 분지지형임. 3부에서 소개할 사천왕사와 망덕사 일화의 주역인 악붕귀(樂鵬龜)는 이곳에 와보고 破此寺 則國亡無日矣,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가기도 했음. 어쨌든 입지가 몹시 탁월한 사찰임.

참고로 이 천룡사지 옆에는 녹원정사란 식당이 있음. 산 중턱에 있는 식당이라 독특한데, 기회가 되면 여기서 식사해보기 바람.

틈수골로 내려오면 와룡암이 나옴. 천룡사지 코스의 들머리인데 계곡이 꽤 볼만함. 데크길 설치해서 정비하면 나름 괜찮을듯.

천룡사지 입구 이정표. 반나절 동안 고생한 지팡이와 함께..

웬 놈의 버스가 40분만에 와서 4시 다 돼서 시내에 돌아왔음. 알 사람들은 다 아는 경주 쫄면집에서 식사하고 숙소 주변을 산책을 겸해 잠시 둘러보고 왔음. 어제 오늘 하도 바쁘게 다니다 보니 경주에서의 첫 식사였음.

동경관. 경주 객사로 좌익랑만 남았음. 경주교육삼락회란 곳을 통해 들어가야 하는데, 문이 닫혀 있어 담장 밖에서만 구경했음.

동경관 옆에는 옛 야마구찌병원으로 쓰이던 화랑수련원 건물이 있음.

좀 더 걸어가면 집경전지가 있음. 조선시대에는 진전을 두어 전국에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공간을 두었는데, 서울 문소전, 전주 경기전, 영흥 준원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이 바로 그곳이었음. 집경전의 태조어진은 임진왜란 중 청량산으로 옮겨 모셨다가, 난 이후 강릉에 임시로 집경전을 설치했음. 하지만 1631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복구되지 못했음.

하지만 경주에서는 지속적으로 집경전을 다시 설치할 것을 요구해 왔음. 따라서 정조는 1796년 이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친필로 集慶殿舊基, 집경전의 옛 터임을 알리는 비를 세웠음.

그런데 정작 집경전지는 그 구조가 이상해서 대체 어떤 형태의 건물인지 종잡을 수가 없음. 긴 통로 형태의 석실인데, 양쪽으로 뚫려 있어 어디 어떻게 어진을 모신 것인지 알 수 없음.

마지막으로 최근 복원된 경주읍성을 찾았음. 요즘 전국적으로 읍성 복원 열풍이 일고 있는데, 상당히 무의미해 보임. 차라리 잔존 성곽 주변만이라도 잘 정비해서 보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을 듯함.

치성. 복원 이전에는 이 치성 부분만 초록 철제휀스로 둘러싸여 있어 꽤나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음.

새로 뽑아낸 듯한 희멀건 성문과 군데군데 노거수가 자라나는 오래된 성곽. 무엇이 더 울림을 주는 장소인지는 자명해 보임.

여하튼 즉흥적인 이동을 한 날이었지만, 남산의 보물 이상급 문화재를 클리어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는 날이었음. 큰 숙제 하나를 푼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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