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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새보] 홍준표가 원래 가려고 한 민주당은 민주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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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의 민주당의 전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96년의 민주당은 국민의힘의 전신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보이는 것 같지만 노무현이 맞다.

국민의힘 전신인데 왜 노무현이 보이냐?
라고 하는 물음이 생길 수 있는데, 
이는 복잡한 민주당 역사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3당합당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합당을 결성하자,
노무현을 비롯한 이기택, 김정길 등이 반발하며 전격 탈당했고

민주당을 창당한다. 이 민주당이 바로 꼬마민주당이다.
그러나 이 꼬마민주당은 여론조사에서는 선전했으나

야권의 분열로 인해 정작 실리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고

김대중이 이끄는 신민주연합당과 창당 1년만에
전격 합당을 하고야 만다.

이 민주당이 바로 민주당(1991)이다.

이렇게 합당한 민주당(91)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 선전을 하면서 민주당(91)에게 정권교체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의 두 축이었던 김대중과 이기택은
경기도지사 공천을 놓고 엄청난 갈등을 벌였고

이기택이 추천한 장경우 의원이 경선에서 승리했으나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처참하게 발리면서

이 갈등은 더욱 극심해졌다. 이 때 불만을 품은
김대중은 경기지사 유세에 가지 않는 등 불만을 대놓고 드러낸다.

결국 지방선거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민주당(91)이지만
이 갈등을 수습하지 못했고

김대중이 동교동계를 이끌고 탈당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그러자 잔류한 민주당(91) 인사들이 시민단체를 끌어와
이 글의 주인공인 민주당(95)를 새롭게 창당한다.

야심차게 출발한 민주당(95)는

이회창 당시 전 국무총리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을 영입하려 했으나

이회창이 신한국당으로,
장태완이 새정치국민회의로 가버리면서

이 계획도 무산된다.

그렇게 맞이한 15대 총선에서 15석이라는 기대에 못미치는
성과를 내며, 당세는 급격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조순 당시 서울특별시장을 15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추대했으나


조순이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과 전격 합당을 선언하며
민주당(95)는 한나라당으로 다시 탄생한다.

따라서 다시 돌아와서 보자면
이 때의 홍준표가 가려한 민주당은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니라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당(95) 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홍준표 영입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홍준표를 영입하려 한 인물은
김대중으로, 오찬에 초대 되었으나

김대중과 밥을 먹으면 누구나 김대중의 품에 안긴다는
말이 세간에 자자했기에 거절했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이후 노무현이 민주당(95) 사람들을 이끌고 밤늦게
홍준표를 영입하고자 집으로 찾아왔고

아직 입당에 대해 확답을 못내린 홍준표에게

불과 몇 시간만에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이
홍준표의 집으로 찾아와 홍준표를 낚아 채 갔다.

물론 이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YS가 직접 홍준표에게
전화를 걸어 영입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장난 시계는 신한국당으로 입당을 결정하고

홍산가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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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새보] 별들의 무덤,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엘리트 보수정당 시절 이라며 올라오는 짤의 주인공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대해 알아보자



2011년은 MB정부 4년차이자, 차기 총선과 대선을 불과 1년 남짓 남겨둔 시점이었다.

따라서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차기 총선의 공천권과, 대선정국이라는 최대의 이벤트를

대응해야 하는 새 지도부를 뽑기 위한 싸움이자


현재권력인 친이계와 미래권력인 친박계가 서로의 주도권을 놓고

영혼의 한타를 벌이는 전장이 되었다.


이 전당대회에서 친이계가 승리한다면, 친이계는 다시금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친박계가 승리한다면 몰락하는 친이계에게 결정타를 날리고, 주도권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시기였다.



당시 친이계는 새 대표로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밀고자 하였다.


김무성은 친박핵심으로 유명하였으나 세종시 수정안 사태 당시 원안을 고집한 박근혜와 달리

수정안을 지지하며, 박근혜와 멀어졌고, 이후 친이계의 지지를 업고 원내대표에 당선되며

친박계에서 비박계로 갈아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무성을 내세운다는 것은 사실상 친이계가 친박계에게 전면전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김무성 카드를 포기했고, 결국 김무성은 차기 전당대회에 불출마 한다.



친이계는 나경원과 원희룡 중에 선택해야 했고, 나경원이 출마를 머뭇거리는 사이

원희룡이 출마를 결정하면서 원희룡으로 청와대의 의중은 교통정리가 완료된다.


나경원은 친이계와 쭉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나, 친이계가 주도권을 잃어가자

점차 친이계와의 거리를 두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기에 선택지에서 배제당한다.


그러나 나경원은 당시기준 호감(?) 정치인이었기에 민심을 등에 업고

전당대회에 출마한다.


그렇게 친이계 후보는 원희룡과 나경원으로 결정된다.



반면 친박계에서는 유승민 카드를 내세워 사실상 단일후보로 추대하며, 친이계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던 한나라당 소장파들은 남경필을 후보로 내세우며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친이VS친박VS소장파 간의 3파전이 될 것 같아만 보였다.




그러나 친이계와 친박계의 혈투 속에서 대세론을 형성하고 있던 것은

친이계와 친박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던 홍준표였다.


유력주자인 원희룡, 나경원, 유승민은 당시 기준으로 상대적으로 뉴비였기에

선수가 높고, 경험이 많던 홍준표가 치고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홍준표는 그간 범친이계로 불리고 있었느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친박계에 대한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친박계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는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1인 2표제 였기 때문이다.


친이계는 친박계 후보를 막기 위해, 친박계는 친이계 후보를 막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2번표를 무계파였던 홍준표에게 몰아줬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명의 날은 밝아왔고,




친박계가 밀어준 홍준표와 유승민이 당심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친박계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친이계가 지원한 원희룡은 4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보여줬고

나경원은 당심에서 참패했으나 민심을 등에 업고

친이계가 지원한 원희룡을 제치고 3위로 당선되는 기염을 보여준다.


또한 소장파의 지지를 받은 남경필이 턱걸이로 당선되며

한나라당의 변화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평가 받았다.


개혁보수인 친박계(진짜임)와 소장파 의원들이 대거 지도부에 합류했고,

평소 친서민 정책을 펼치던 홍준표(진짜임)가 대표에 당선되었으며,

좌클릭을 주장하던 황우여 원내대표(진짜임)이 이끄는 새 한나라당 지도부는

보수정당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 대목이었다.


그렇게 변화된 한나라당을 보여주려 했으나



오세훈이 핵폭탄을 집어던지고



선관의 디도스 테러 사건이 터지며

한나라당 홍준표 지도부는 1년도 못 가 붕괴 위기에 처한다.




그러자 유승민을 필두로, 당 내 최고위원들이 동반 사퇴하면서

홍준표 지도부는 붕괴당한다. (이준석, 한동훈이 당한 그거 맞음)


당시 유승민은 당을 박근혜에게 넘기고 박근혜의 얼굴로 총선을 치뤄야지

한나라당이 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박근혜는 이런 유승민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도저히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심차게 출발한 한나라당 개혁지도부는 붕괴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전당대회는 보수정당 네임드들이 총출동한 전당대회였으나

이들의 끝은 매우 비참했고


출마한 모든 이들이 정치적으로 크나큰 몰락을 겪는다.


홍준표는 대표직에서 반강제적으로 끌어내려 앉혀졌고, 이후 19대 총선에서 패배했다.


유승민은 박근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비대위를 주장하며 지도부를 붕괴시켰고, 이로 인해 박근혜에게 찍혔고

당명 개정과 관련하여 박근혜와 맞서면서 완전한 결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결별은 정치인 유승민의

고난의 씨앗이 되었다.


나경원은 오세훈의 사퇴로 인해 서울시장 보선에 출마했으나 온갖 네거티브 폭탄을 맞고 정치적으로 몰락했으며


원희룡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서울시장 경선에 출마했으나 나경원에게 패배하면서 야인이 되었다.


남경필은 모두가 알다싶이 아들문제로 정계에서 은퇴했고,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출마했던 권영세, 박진의 경우

두 번 내리 낙선 또는 낙천하면서 정치적으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몰락한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계를 은퇴한 남경필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려하게 복귀하여


지금도 보수정당의 핵심세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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