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역시 호텔에서 푹 쉬고, 관광도 하니까 출발이 산뜻하다
딱히 허기진 느낌도 안 들어서 이제껏 그래왔던 것 보다 더더더 대충 떼우고 출발했음
오늘은 파란 루트, 빨간 루트, 노란 루트 중 노란 루트를 타기로 했고, 점선은 페리임
왜냐? 빨간 루트로 가면 어제 볼 거 다 본 사쿠라지마를 달려야 하고, 파란 루트로 가면 너~무 돌아가야 하기 때문
그래서 적당히 새로운 길이기도 하고, 페리 타고 꿀도 빨 수 있는 노란 루트를 선택했다
날 겁쟁이라고 불러도 좋아...
노란 루트는 이처럼 장애물 하나 없이, 요철 하나 없이 평탄한 해안길로만 이루어져 있다
빨간 원 안의 조그맣게 보이는 반도가 내가 페리를 탈 터미널임
그래도 장애물이 아예 없지는 않더라고
자전거길이 따로 없는 국도인지라 교통 흐름에 방해 줄까봐(이 때 시각이 한창 출근할 시각이었음) 다른 길로 살짝 틀었는데, 거기는 또 자전거가 달리기엔 길이 너무 좁아서 불가피하게 끌바를 해야 했었음
이제껏 난 사람이 없는 시간에 들러서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떠나는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에 사람이 북적이는 미치노에키는 처음 보여주는 건데, 대충 이런 분위기임
초등학생 한 명이 쭈뼛거리면서 다가와서는 한국에서 왔냐고 물어보더라고?
어 한국에서 왔고, 지금 자전거로 이래저래 돌아다니고 있어 해 주니까 슥게~ 하면서 엄마아빠한테 달려가는 모습이다
마마! 아노 오지상 지텐샤데~ 어쩌고 하면서 달려갔는데... 오지상... 아니야 이눔아...
내가 있는 곳이 이부스키라고 했었지?
이부스키는 벳푸나 유후, 노보리베츠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임
온천 도시답게 하수도에서도 김이 펄펄 끓어오르고 있다
근데 이쯤에서 스포크 터짐ㅋㅋ
이건 일본 와서 생긴 문제라기보단 한국에서부터 있던 문제인데, ep.00에서 패니어백 때문에 스포크 야기저기 휘고 난리 났었다고 했던거 기억 남?
나도 출발 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문제고, 그래서 수리하고 출발하려고 자전거 샀던 샵에도 들렀었는데 '이 정도 휜 건 괜찮다'면서 수리를 못 받았었음
뭐 전문가가 괜찮댔으니까 괜찮겠제~하고 출발했지만 결국 이 사단이 나 버렸네
뭐... 오늘 잘 곳까지는 3km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그냥 끌바해서 갔다
해 뜨면 자전거샵이 문을 열든가 하겠지
텐트 쳐 놓고 담배피고 있었는데 이미 거하게 걸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셔서는 잔을 나눠주고 대작을 청하셨다
이부스키 소주에 녹차를 섞어주셨는데 비 오는 거 보면서 마시는 전통소주에 녹차??? 오우~ 섹스인데~
아무튼 잔이 돌기를 벌써 몇 순, 그동안 무슨 얘기를 나누었느냐?
아메리카인, 폭탄을 두 번, 공습때문에 어릴 때 잠을 못 잔 기억, 나나 지금의 일본인들은 미국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국을 침략, 한국의 반일감정은 어떻느냐... 등의 역사와 정치가 아주아주아주 깊게 엮여있는 대화를 나눴다
사실 여기서 혹시 무서운 혐한우익 할아버지는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사실 '먹을 것'을 나눠준다는 건 만국공통의 호의의 표시잖아?
게다가 계속 얘기해보니 그 시대 분 치고는 엄청나게 깨어있고 개방적이신 분이셔서 더듬더듬 대화 나누는 게 엄청 즐거웠음
더 자세한 서술은 로싸갤에 정떡 뿌리고 실베 상주하시는 VPN 다중분신술 사용 유동 분들 자극하는 것밖에 안 될 수 있기 때문에 대충 생략함
이런 느낌이었는데... 할아버지도 많이 취하셔서 청취가 안될 뿐더러, 내 일본어 실력도 일천해서 서로의 뜻이 잘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화가 끝나고 헤어질 때 할아버지께서 웃으며 '미워하지 않는 건가, 다행이다. 일본을 즐기다 가줘' 등의 말씀을 해 주신 걸 보면 마음은 통했던 모양임 아마...?
대화가 끝난 후 텐트에 들어갔고, 아무튼 이렇게 10일차도 끝났다
하루 종일 9,000원 썼네;
기상.
미치노에키 근처에 자전거가게가 있길래 방문해 봤지만 정말 영세한 동네 자전거가게였고, MTB 스포크 수리는 못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시발 어쩌지?
어쩌긴 분명 큰 샵이 있을 가고시마까지 돌아가야지...
주말이나 공휴일에만 자전거 적재를 허용해 주는 한국 철도와는 달리, 일본은 자전거를 자전거 가방에 넣기만 한다면 언제나 전철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다
근데 내가 지금 자전거 가방이 없잖아?
그래서 자전거는 미치노에키에 세워 두고, 바퀴만 달랑 들고 근처 야마카와 역으로 걸어가서 전철에 올랐음ㅋㅋ
가고시마 시내, 타니야마역 근처에는 역시 꽤나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자전거 샵이 있었다
MTB, 빕숏, 수리도구, 헬멧 등등을 전부 취급하는, 자전거를 생활이 아니라 취미로 타는 사람들이 들를 법한 샵이었음
특이하게 카페도 겸하길래 아아 한 잔 사 마셨다
그나저나 샵 도착시각 12시, 수리가 끝나면 15시, 전철 타고 다시 이부스키로 돌아가면 17시... 오늘도 이부스키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 하네
바퀴를 고치고 야마카와 역으로 돌아왔다
진이 다 빠져서 걸어가는 것도 싫고, 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리길래 택시 탔음
이 글 후반에 쓰겠지만 이 때 운전해 주신 기사님 몇 번 더 만나는데 정말 친절하고 감사한 분이심
미치노에키에 내려서 바퀴 조립해 보니까 잘 굴러가드라
'미치노에키 노숙'을 할 때는 사람이 없는 시간에만, 떠날 때는 깨끗하게, 연박은 자제 이렇게 세 개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부스키 시내의 게스트하우스를 잡았음
가보자 가보자~
근데 이럴거면 끌바로 야마카와역까지 오고 여기서 바퀴 조립한 다음에 이부스키 시내 가는 동선이 맞지 않았나?
뭐하러 걷고 열차 타고 택시 타고 난리 부르스를 춘 거지?
원래 멍청하면 몸이 고생하거나 지갑이 가벼워지기 마련이다
병신...
게하는 뭐... 특별한 점 없이 딱 게하다운 느낌이었음
지역 관광 팜플렛을 보니 이부스키 시내 곳곳에 이브이 시리즈 맨홀 뚜껑이 있다고 하네?
'이부'스키여서 그런 걸려나? 밖에 비도 올랑말랑하는데 이거 보려고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아서 찾아가 보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해 보려고 씻고 '초주안'이라는 이름의 지역 맛집에 들러 봄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는데, 신기한게 태극기 붙어있는 해군 후리스도 안 입고 있었고, 말 한마디 안 했는데 한국어 메뉴판 딱 갖다 주더라고
관광지에서 일하려면 이 정도 눈썰미는 있어야 하는 건가
스지동 + 미니우동 세트에 생맥 ㅗㅜㅑ
역시나 온천 도시 아니랄까봐 위에 온센타마고도 하나 올려 준다
아무거나 잘 먹고 미식도 잘 모르는 타입이라 맛 표현은 잘 못하지만... 양념은 간장 베이스인 것 같고, 일본 음식 하면 떠오르는 과한 단 맛이나 짠 맛 없이 딱 적당하게 간이 베어 있었음
아, 그리고 스지(소 힘줄)이래서 꼬들꼬들한 식감을 기대했었는데 얼마나 오래 푹 고았는지 입에 넣으면 그냥 녹아버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써놓고 보니까 엄청 상투적이네 맛 표현은 나랑 잘 안 맞는 걸로 하자
계란말이에 칼피스 하이볼 추가
랜덤음식디펜스 가보자~
어... 근데 어머니랑 전화 한 통화 하고 왔는데 상을 치웠더라... 계산도 안 했고 지갑도 올려두고 갔었는데 왜ㅠ
점원 분한테 상황 설명드렸더니 주방장? 아무튼 짬 좀 높아 보이시는 분도 주방에서 뛰어나오셔서는 받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과를 하셨다
먹던 칼피스하이볼이랑 계란말이는 새거로 다시 내와 줬음
스지동도 칼피스하이볼이랑 같이 먹으려고 반 정도 남겨놨었는데 아쉽지만 이거까지 새거로 달라하는 건 좀ㅋㅋ
계산하고 나갈 때도 죄송하다고 가게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수건을 하나 주시길래 받아왔다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라 그런가 이부스키역 앞에 시에서 운영하는 무료 족욕탕이 있었거든?
숙소에서 나올 때 수건을 안 들고 나와서 오는 길에 족욕을 못 했었는데 마침 수건이 생겨서 족욕도 하고 돌아갔어
오늘은 수리 공임 + 숙박비 + 식사비 해서 좀 과소비했다
하지만 식사가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돈 생각은 따로 안 하고,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기대어 그대로 잠들었음
일어났는데 비가 온다
쏴아아아 내리는 비도 아니고 10분 찔끔 내렸다가 멈추고 또 찔끔 내리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기분 나쁜 비가...
근데 8시, 아무리 늦어도 10시에 출발하는 페리를 타야 오늘 안에 일본 최남단 사타미사키를 찍을 수 있어서 그냥 맞으면서 갔다
이부스키 시내에서 야마카와 페리 터미널 가는 길에 있는 이 지긋지긋한 터널
끌바로 가고, 걸어서 가고, 전철타고 가고, 택시타고 가고, 쨍쨍한 날 가고, 비오는 날 가고, 밤에 가고 진짜 몇 번을 오고갔는지 모르겠음
가는 길에 군것질도 하고...
혀가 아릴 정도의 단 맛을 기대하고 샀던 온천 사이다랑 호박고구마양갱은 생각보다는 별로였다
오히려 별 기대 없이 샀던 아이스크림이 히트였음
안에 들어가 있는 과일 잼이 과육도 씹히고 진짜 지대루더라
근데 이거 먹고 있으니까 미치노에키에서 My heart will go on 틀어주던데... 항구 근처에서 이런 선곡은 좀 악취미 아니냐...?
아무튼 다 먹고 페리 터미널까지 설렁설렁 왔다
씨!!!! 발!!!!! 아침까지만 해도 정상운행한댔잖아!!!!!!
계획을 수정하려고 보니 내일도 비 소식이 있는 상황...
아마 내일도 결항일 것이다
그럼 나한테 남은 선택지가 그제 탔던 노란 루트 그대로 다시 타고 올라가서 파란 루트를 또 타는 것 뿐이라고?
여기서 마음이 꺾였다... 그냥 전철 타고 점프 좀 뛰자...
근데 위에서 자전거 가방이 없으면 전철 못 탄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렇다
또마카와역, 또니야마역, 또전거샵 순서대로 들러 자전거 가방을 사고는 그 역순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자전거 가방에 담고 다시 전철을 타야 한다
기적의 동선ㄷㄷ
?
알고 보니 자전거 샵은 쉬지만 같이 딸려있는 카페는 영업을 하는 날이어서 구글 지도에 영업 중이라고 떴던 거였더라고 한다
지랄났다 진짜...
자전거 가방 사고 다시 야마카와역으로 돌아왔다
그저 집같은 익숙함... 난 어쩌면 이부스키 시민이었던게 아닐까???
아까 얘기는 안 하고 넘어갔었지만 낮에 야마카와역에서 출발할 때 1시간 정도 전철을 기다려야 했었는데, 그 때 택시기사 성님들 두 분(한 분은 어제 태워 주셨던 분)이랑 맞담 피면서 여러 얘기를 나눴었다
한국인이 여기서 뭐 하고 있는거냐(혐한 아님), 아 예 지금 자전거로 이래저래 여행 중입니다, 젊음이 역시 좋구만~ 등등... 익숙한 패턴의 여행 얘기였음
얘기 끝나고 간바레, 키요츠케테 하면서 엉덩이 툭툭 치고 손님 받으러 가셨었는데 어제 술 나눠주신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이 이런 헛짓거리 하고 있는 젊은 놈 좋게 봐주시는 건 만국공통인 것 같음ㅋㅋ
아 그리고 사타미사키 쪽에 가면 야생 원숭이가 말썽이라고, 특히 관광객 없는 비수기인 지금은 사람과 그 사람이 들고 있는 물건이 특히 고플 시기일 거라고 원숭이 경고까지 해 주셨다 ㄷㄷ
...원숭이한테 텐트 뺏기고 종주 실패! 엔딩 나는 것도 나름 념글 각일지도...?
아무튼! 도착해서 역 밖으로 나와보니 반가운 기사님이 아직도 계시길래 다녀왔습니다 한 번 박고 또 담배를 나눴다
진짜 정말 너무 놀랍고 감사하게도 역 앞에서 운행 대기 중일 때는 자전거 누가 안 가져가나 봐 주시고, 비 좀 거세진다 싶으면 비 안맞게 처마 아래로 옮겨주시고 하루 종일 이러고 계셨대...
구마모토에서 도와주신 분들도 그렇고, 내가 뭐라고 일본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큰 친절을 베풀어주시는지 모르겠네
이번에도 120도 인사 세 번 박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 묵었던 그 숙소고, 오늘은 나 혼자길래 게하 주인 양해 구하고 방에 살짝 젖은 침낭도 널어서 말리는 중이야
이걸로 오늘 에피소드도 끝임
꽤나 오랜만에 즐기는 관광, 일본인들의 친절함에 힐링이 된 건 된 거고, 내일까지 하면 지금 벌써 5일이나 가고시마-이부스키 이 좆도 아닌 구간에 갇혀있는 셈이다
시간도 돈도 원치 않게 과소비를 한 상황...
당분간은 밥값도 아끼고 숙박비도 아끼고, 자전거 가방도 있겠다 조금만 꼬우면 전철 점프를 뛰는 식으로 무자비한 긴축재정, 기간단축을 실시할 예정임
순수한 자전거 종주, 그런 고행을 기대하고 읽는 로부이들한텐 미안하지만ㅠ 나도 정해진 예산이 있고 복학 전까지는 돌아가야 하는 몸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럼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진짜 일본 본토 최남단 사타미사키를 보여줄 수 있길 바라며, ㅂ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