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전세계에서 몰리는 경기 순위
순위 오즈
1 네덜란드 1.25
2 이집트 1.44
3 웨일즈 1.02
4 세네갈 1.40
5 알제리 1.50
종목별 팀순위
1 첼씨 8 6 1 1 19
1 첼씨 8 6 1 1 19
1 첼씨 8 6 1 1 19
1 첼씨 8 6 1 1 19

마틴 루터 킹을 혐오한 1968년의 미국인들

작성자 정보

  • 스포츠분석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마틴 루터 킹의 날 기념.


당파성을 제쳐두고, 오늘날 미국인들이 연령대, 정치성향, 인종을 불문하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틴 루터 킹이다. 2024년 1월 Yougov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88%는 마틴 루터 킹을 존경한다고 답했으며,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한 의견은 겨우 5%에 불과했다. 2021년 7월 Yougov의 여론조사와 비교하자면, 이 여론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은 80-9 였고, 조지 워싱턴은 80-10이었으며, FDR은 58-17, 로널드 레이건은 54-31이었다. 공화당원의 82%, 민주당원의 94%가 루터 킹 목사에 대해 호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18-24세에서는 97%, 55세 이상에서는 89%, 흑인은 100%(부정응답자가 한명도 없었음)와 백인은 93%가 킹을 존경했다.


킹은 이제 너무 존경받아서 전설이라 할만하다. 나 역시 마틴 루터 킹을 아주 존경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이상주의자이자 훌륭한 민권운동가로, 20세기 미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인물중 하나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로 95주년인 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1968년 4월 그가 흉탄에 맞아 쓰러졌을때, 미국인들이 지금처럼 마틴 루터 킹을 존경했을까? 사실 여론조사는 킹에 대한 미국인의 정서가 한번도 호의적이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도리어 1966년 이후, 킹 목사에 대한 미국인의 여론은 매우 나빴으며 일부 흑인조차 킹 목사를 불신하였다.


마틴 루터 킹이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1955년 몽고메리 버스 파업 당시이다.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인이 버스 앞좌석에 앉았다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자, 분개한 앨라배마의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벌였고, 이를 조직한 것은 27세의 젊은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이었다. 이후 1950년대 후반까지 킹의 역할을 더욱 강화되었다. 1962년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에서 강경한 인종주의자인 조지 월리스가 당선되자 킹의 정치적 입지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는데, 그는 월리스 주지사의 강압적인 반흑인 정책에 저항하는 리더로 부상하며 W. E. B. 두보이스 이후 가장 명망높은 흑인의 리더가 되었다. 1963년 5월 2일 월리스 주지사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발하는 의미에서 앨라배마의 주도 버밍햄에서 킹이 이끄는 흑인 수만명이 행진을 벌였다. 월리스 주지사는 강경 대응을 선포했고, 주방위군이 출동해 물대포와 사냥개롤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559명을 체포했다. 


앨라배마 주방위군의 진압을 당하고 있는 흑인 시위자들.


1963년 5월 버밍햄 행진 직후, 갤럽은 처음으로 마틴 루터 킹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킹 목사에 대한 미국인의 여론은 분열되어있었다. 미국인의 총 41%는 킹을 긍정평가했고, 37%는 그를 부정평가했다. 세부적으로 "아주 긍정"은 16%, "아주 부정"은 25%였다. 인종별로는 더욱 분열상이 드러났다. 흑인의 92%가 킹을 긍정평가한 반면, 백인 중 킹을 긍정평가한 응답자는 겨우 35%에 불과했다.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에 투표한 백인이 50%정도 되므로 진보층 백인 중 일부조차 킹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1963년 8월, 마틴 루터 킹은 워싱턴 D.C.에서 흑인의 행진을 기획했고,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연설을 했다. 이때도 백인들은 킹의 행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1963년 8월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킹의 조직된 시위를 긍정평가한 여론은 23%에 불과했다. 많은 백인들은 킹 목사의 "비폭력"을 위선적이라고 바라보았다. 흑인 민권운동을 폭력과 동치시켰으며, 린든 B. 존슨 대통령도 킹을 "위선적인 폭력 선동가"라고 지칭하며 그를 비난했고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에게 "그 공산주의자"가 "폭.동을 조직하지 못하도록" 엄밀하게 사찰하라고 지시했다. 존슨은 킹의 혼외정사 녹취록 파일을 들으면서 후버와 함께 박장대소했다.


1968년, 킹이 죽을때까지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여론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킹의 민권운동과 잇따른 구속은 대다수 백인과 소수 흑인들에게 그가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으로 비추어졌고, 일부 흑인들은 그가 지나치게 "온건"하다고 바라보았다. 1964년 6월, 킹은 플로리다의 레스토랑 인종 분리를 반대하다가 구속되었다. 2개월 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마틴 루터 킹에 대한 긍정 여론은 44%, 부정 여론은 38%였다. 1965년 3월 셀마에서의 흑인 행진 후인 5월의 여론조사에서 긍정평가는 45%로 증가했으나 부정평가는 48%로 더욱 증가했다. 특히 "아주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30%나 되었다. 1966년의 조사는 킹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된 것을 보여주었다. 그 해는 킹이 가장 열정적으로 북부로 흑인 행진을 확대한 시기였다. 킹의 지지율은 33%로 떨어졌고, 부정평가는 63%로 증가했다. 킹을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 여론도 44%나 되었다. 백인 중 킹을 긍정평가한 여론은 27%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흑인들이 그의 운동을 100%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1966년 갤럽의 조사에서 흑인 중 킹을 지지한 여론은 83%였고 그의 노선을 지지한 여론은 71%였다. 낮은건 아니지만, 21%의 흑인은 그가 너무 "물렀다"라고 답했고 맬컴 X를 킹보다 선호했다. 심지어 8%의 흑인들은 킹이 너무 과격하다고 응답하기까지 했다.


갤럽의 여론조사인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에서도 킹은 종종 순위에 들지 못했다. 1964년 그는 4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였으나, 이후에는 순위에서 탈락했다. 1967년 12월의 조사에서 그를 제친 여러 사람들의 명단을 보면 빌리 그레이엄(3위), 리처드 닉슨(7위), 조지 월리스(8위), 로널드 레이건(9위) 등 백인우파의 지지를 받은 인물들이 눈에 띈다. 반면, 갤럽의 "미국인이 가장 혐오하는 인물" 순위에서 킹은 언제나 상위권이었다. 이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47%를 기록한 조지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였고, 2위는 42%를 기록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킹에 대한 풍자화. "나는 또다른 평화시위를 기획하고 있습니다"라는 킹의 뒤로 불타는 시가지가 보인다.


1968년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극에 달했다. 이 시기 킹의 전환점은 노골적으로 좌파를 지지하고,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했다는 점에 있었다. 킹은 베트남 전쟁의 휴전을 촉구하며 반전 운동에 지지를 보냈는데, 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대다수의 미국인은 물론 동료 흑인 목사들조차 킹이 너무 정치적으로 깊게 관여하고 있으며 그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야심이 있는지 의심했다. 존슨의 비밀 녹취록에서, 린든 존슨 대통령은 킹의 베트남 전쟁 반대를 비난하며 그를 야망에 몰두해있는 정치꾼이라 헐뜯었다. 백인 언론들은 킹을 "흑인 폭도와 20대 반전운동가를 결혼시킨 자" 등으로 조롱했다.


1968년 해리스의 여론조사에서, 75%의 미국인이 킹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긍정 평가는 20%에 그쳤다. 암살당하기 직전, 그는 미국에서 가장 혐오받는 인물이었다. 


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포스터.


반면 조지 월리스의 여론조사 수치는 계속 상승세였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흑인 민권운동을 폭.동이라 비하하고, 미국에 법과 질서를 가져올 것이며 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어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한 월리스의 지지율은 무려 20%를 넘나들었다. 1912년 대선 때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제3지대 무소속 후보가 저렇게 많은 지지를 기록한 것은 유례가 없었다. 그는 킹 목사의 기반인 조지아주와 앨라배마주, 미시시피주를 포함한 남부 5개 주를 휩쓸었고 13%를 득표했다. 마찬가지로 민권운동을 비난한 리처드 닉슨은 그 해의 대통령 선거 승리자가 되었다. 


마틴 루터 킹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킹은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했고, 그를 존슨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했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킹만큼이나 인기가 없었고 75%의 미국인이 그를 기회주의자로 바라보았다. 죽기 사흘 전, 킹은 동료 흑인 민권운동가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우리는 마틴 루터 킹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걸 인정할때가 왔다... 내 이미지의 손실 때문에 흑인 민권운동이 차질을 빚고 있다"라고 털어놓았다. 존슨의 측근들은 존슨 대통령에게 "킹은 너무 인기가 없어서 흑인 민권운동의 전략에 수정이 있을 수 있다"라고 보고했다. 존슨의 표현에 따르면, 죽기 직전 킹은 "궁지에 몰렸다".


킹이 사망할때도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적 애도의 분위기는 없었다. 비록 킹의 사망 직후 인디애나폴리스(로버트 케네디가 흑인 밀집지역을 찾아 킹을 추모하는 연설을 함)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음에도, 국가적인 분위기는 분노나 항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킹의 사망을 "슬프다"라고 평한 의견은 38%였고, "화가난다"라는 의견은 불과 5%였다. 동시에 "킹은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다"라는 의견이 무려 31%를 차지했다.


----


이러한 킹의 평판은 그의 사망 후, 제시 잭슨과 같은 여러 킹의 후계자들이 보다 현실적인 노선을 택하고 흑인 민권운동을 주류 운동권에 편입시키려 노력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1970년 제시 잭슨은 기존 킹의 조직인 SCLC에서 탈퇴해 Rainbow/Push를 창립했다. Rainbow/Push는 기존 킹의 노선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는데, 사회주의(킹의 정치적 노선)에 대한 포기, 흑인 사업체 육성, 흑인 자영업자 지원, 백인우월주의 기업 불매운동, 주류 정치권으로의 적극적인 영향력 확대, 민주당과 협력 강화, 흑인만의 계파정치 조직 형성 등, 킹의 이상론과는 다른 현실적이고 정치투쟁적인 목표가 많았다. 마틴 루터 킹이 사망했을 때 흑인 하원의원은 겨우 1명이었다. 이는 점차 개선되었다. 1983년, 최초의 흑인 시카고 시장이 배출되었고, 1989년 최초의 흑인 뉴욕시장이 배출되었다. 2023년 현재 원내 흑인 하원의원 수는 63명에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킹의 후계자들은 흑인 민권운동을 주류 정치권에 적극적으로 영합시켰다.


흑인 민권운동은 더이상 소수가 아닌 다수의 목소리였고, 주류 정치권은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주류 정치권의 "킹 재평가" 노력이 강화되었다. 로버트 버드 상원의원은 KKK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인종주의자였다. 하지만 1980년대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재평가에 앞장섰고,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에 주도적인 노력을 하였다. 1983년 상원은 78표의 찬성으로 마틴 루터 킹의 날을 제정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앨라배마 주의 변화였다. 앨라배마 주의회는 만장일치로 로버트 E. 리 장군과 마틴 루터 킹의 날을 동시에 공휴일로 하자는 합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은 앨라배마 주지사에 의해 서명되었고, 그 서명자는 바로.... 조지 월리스 주지사였다. 월리스는 1984년 대선에서 제시 잭슨을 지지하고 킹을 탄압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는 발언을 남겼다.


여론은 그것을 따라왔다. 1975년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67%의 미국인은 마지못해 킹이 흑인 민권을 개선했다고 응답했다. 1983년 연초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을 찬성하는 여론은 47%였고, 반대하는 여론은 48%였다. 하지만 여론은 연말로 접어들면서 점차 찬성으로 기울었다. 1990년, 애리조나 주가 마틴 루터 킹의 날 제정을 거부하며 주법에서 공휴일 지정을 반대하자, NFL은 1993년 슈퍼볼을 애리조나 주에서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미국인의 63%는 NFL의 "캔슬"을 지지했고, 캔슬에 반대한 여론은 겨우 25%였다. 2011년, 킹 기념관이 건립될 당시, 킹에 대한 긍정 여론은 이제 90%대로 올라와있었다.


----


정리하자면 마틴 루터킹은 처음부터 영웅이 아니었다. 그것은 후대의 많은 흑인민권운동가들이 노력한 결과물이자, 결국 주류 정치권이 흑인 민권운동을 무시할 수 없게되면서 일어난 장기간에 걸친 변화였다. 그렇기에 킹의 고독한 투쟁이 더욱 고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교훈도 준다. 특정 시대에 정의와 올바름이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결국은 사필귀정이다. 30년, 40년, 50년이 걸리더라도 진실은 승리하고 역사는 올바르게 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미국사는 이렇듯 정의가 언제나 패배하고 강자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다양성과 민주주의, 자유, 정의가 승리해온 오랜 점진적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And when this happens, when we allow freedom to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그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모든 마을, 모든 부락으로부터, 모든 주와 도시로부터 자유가 울려 퍼지게 할 때, 우리는 더 빨리 그 날을 향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태인이건 비유태인이건,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그 날 말입니다 - "드디어 자유가, 드디어 자유가! 전능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자유로워졌나이다!"

- 마틴 루터 킹, 1963년 8월 연설 中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6,752 / 3088 페이지
번호
제목
이름
    • 1
      다아라
      268,292 P
    • 2
      GodGhs
      213,524 P
    • 3
      돈뱅석
      186,762 P
    • 4
      사탕
      169,400 P
    • 5
      jym0405
      146,387 P
    • 6
      소이
      145,700 P
    • 7
      곽두철이다
      143,223 P
    • 8
      간쥐떼
      140,200 P
    • 9
      jordan
      133,000 P
    • 10
      Kaeee
      127,950 P
    • 1
      이재림
      LV. 44
    • 2
      GodGhs
      LV. 41
    • 3
      돈뱅석
      LV. 41
    • 4
      다아라
      LV. 32
    • 5
      역삼동
      LV. 32
    • 6
      robin
      LV. 32
    • 7
      럭키비키데이
      LV. 32
    • 8
      minmin
      LV. 31
    • 9
      눈보라
      LV. 31
    • 10
      소년소녀백성
      LV. 31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