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여말선초 주심포식 건축의 특징과 변화를 다루었음.
이번 글에서는 이 시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과 변화, 그리고 익공식의 성립에 대하여 설명하려 함.
[1. 15세기 이전 주요 건축물 목록]
다포식은 고려 후기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기에 한반도에서는 그 역사가 1300년대까지만 올라감.
[2. 황주 성불사 응진전(1327). 사진 : 북한의 전통사찰]
현존하는 고려시대 다포계 건축물은 모두 이북지역에 위치함. 그 중 평양 숭인전과 황주 성불사 응진전이 각각 1325년과 1327년 지어진 것으로 그 시기가 가장 이름.
[3. 평양 숭인전 공포(1325). 사진 : e뮤지엄]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걸릴 때 창방이 하중을 모두 버티지 못하기 때문에 주두가 안정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넓적한 직사각형 형태의 평방이 추가됨.
[4. 평방과 창방. 그림 :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주심포계와 다포계는 단순히 공포의 위치에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공포의 형태에 있어서도 꽤나 큰 차이가 보임. 조선 중기 이전 주심포건축의 주류인 주삼포 건물에서는 대체로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익공에 가까운 형태임. 반면 다포계는 살미 끝이 아래로 처져 있는 쇠서형, 즉 제공임. 아래 두 사진 속 살미를 비교해 보기 바람.
[5.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15세기), 주심포식]
[6. 황주 심원사 보광전 공포(1374), 다포식. 사진 : 북한의 전통사찰]
초기의 다포계 건축물에서 쇠서를 사용한 것은 하앙계 공포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됨. 하앙(下昻)식이란 기둥머리에서 아래 방향으로 뻗어내린 부재를 말하는데,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하여 처마를 들어올리는 일종의 원시적 공포라고 할 수 있음.
[7. 하앙의 형태. 그림 : 「송 『영조법식』의 청당 건축계획과 하앙의 관계 연구」 (백소훈, 2017)]
하앙은 고식건축에서 나타나는 부재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동아시아 전역에서 두루 쓰였음. 하지만 한반도에는 당대의 건물이 남아있지 않고, 유일하게 하앙계 공포구조를 하고 있는 건축물이 완주 화암사 극락전임.
[8. 완주 화암사 극락전 하앙계공포]
화암사 극락전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건물이기에 하앙의 쓰임이 많았던 고려시대까지의 사용 양식과는 차이가 클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것 이외의 사례가 없어 확언할 수 없음.
[9. 하앙 상세. 그림 : 위와 동일]
위 그림의 적색 부분을 본다면 앞서 살펴본 수서형 살미와 상당히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음. 이와 같이 초기의 다포계 살미는 하앙을 모방하였기에 가앙(假昻)이라고도 함.
초기의 다포계 건축에서 쓰인 쇠서형(牛舌形) 살미가 아래쪽으로 처져 있는 수서형(垂舌形)인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임. 반면 8부에서 설명할 조선 후기의 살미는 앙서형(仰舌形)으로 위로 치솟은 형태임. 아래 사진과 비교해 보기 바람.
[10.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공포(1762). 앙서형]
한편, 위 9번 그림에서 하앙이 설치된 건물에서는 보가 하앙과 만나며 둥글게 말려 청색으로 표시된 빈 공간이 생긴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초기의 다포계 건축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한 흔적이 보임. 아래 황주 심원사 보광전 공포의 적색 표시에서 보이듯 살미가 아래로 뻗기 전에 아래 부분이 살짝 접한 것이 보임.
[11. 황주 심원사 보광전 공포(1374). 사진 : 북한의 전통사찰]
6부에서 말했듯 고식건축에서는 살미와 첨차의 구분이 없었음. 봉정사 극락전은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는 유일한 예인데, 9번 그림의 녹색 부분을 보면 고식건축에서는 살미 또한 첨차와 같이 과거에는 U자형으로 굽어 안쪽에 빈 공간이 생겼음을 알 수 있음.
[12. 안동 봉정사 대웅전 공포(1400년경)]
[13. 서울 숭례문 공포(1398). 사진 : e뮤지엄]
봉정사 대웅전과 숭례문은 남한 최고(最古)의 다포계 건축물임. 두 사진의의 적색 표시를 보면 빈 공간이 흔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공안이 나타남.
청색 부분은 11번 사진에서의 하앙 흔적이 퇴화하여 공안으로 남은 것임. 이러한 흔적들은 크게 필요가 없는 부분들이라 여말선초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나타남. 내가 참고한 「조선시대 불교건축의 역사」(홍병화 저, 민족사)에서는 은출화두자(隱出華頭子)로 소개하고 있으나, 아직 정해진 명칭은 없음.
[14. 평창 월정사 중대적멸보궁 공포(1400년대). 사진 : 문화재청]
월정사 중대 적멸보궁은 겹건물 구조로 된 독특한 건축물임. 외부 건물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라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내부 건물의 공포를 조사한 결과 봉정사 대웅전, 숭례문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살미와 첨차의 공안이 발견되어 1400년대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음. 자세히 보면 숭례문에서와 같이 하앙의 흔적도 보임.
[15. 안변 석왕사 호지문 공포(1392). 사진 : e뮤지엄]
[16. 안변 석왕사 응진전 공포(1386). 사진 : e뮤지엄]
이제 직접 확인해보기 바람. 위 호지문에서는 11번 사진과 같이 하앙의 흔적(은출화두자)이 직접적으로 남아 있고, 응진전은 봉정사 대웅전과 같이 공안의 형태로 남아 있음.
[17. 서산 개심사 대웅전 공포(1484)]
이후 조선 초기, 15~16세기의 다포계 건축은 그 예가 극히 적음.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함. 15세기 건축물인 서산 개심사 대웅전은 여말선초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다포계 건축물임. 살미의 쇠서는 여말선초에 비해 좀 더 아래로 뻗은 모습임.
[18. 울진 불영사 응진전 공포(1578)]
[19. 영주 부석사 안양루 공포(1576), 사진 : 문화재청]
[20. 춘천 청평사 극락보전 공포(1557), 사진 : e뮤지엄]
이후 150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포는 살미의 쇠서 끝이 점차 위로 치켜올라가는 양상을 보임. 수서형에서 앙서형으로 바뀌어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모습임. 전체적으로 뭉뚝한 느낌을 주는 것도 특징임. 이 시기에는 앙취(昻嘴), 즉 살미 쇠서의 끝부분이 명확한 오각형이 되기도 하였음. 다만 포수는 임란 이전까지 5포식으로 유지되었음.
[21. 영주 성혈사 나한전 공포(1553)]
다만 이 시기의 모든 살미가 뭉뚝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님. 영주 성혈사 나한전은 1553년 초창된 건물로, 살미에 위에서 언급한 하앙의 흔적(은출화두자)가 나타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공포는 초창 당시의 것임을 알 수 있음. 성혈사 나한전의 쇠서는 위의 여러 사찰들에 비해 예리한 마무리를 보이고 있음.
[22. 창녕 관룡사 대웅전 공포(1617)]
[23. 서울 창경궁 홍화문 공포(1616)]
[24. 고성 옥천사 대웅전 공포(1657)]
임진왜란 ㄱ후의 공포 양식은 임란 이전과 큰 차이는 없었음. 다만 점차 쇠서가 더 상승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된 양상이었음. 이러한 조선 후기 건축의 흐름은 이어질 8부에서 계속하겠음.
[25. 고성 건봉사 대웅전 공포(1879). 사진 : e뮤지엄]
[26. 고성 신계사 대웅전 공포(1887). 사진 : e뮤지엄]
[27. 서울 환구단 황궁우 공포(1897)]
조선 초기의 건축은 크게 주심포와 다포로 양분되었음. 그러나 16세기부터 새롭게 대두된 양식은 익공식이었음. 익공식은 주심포식에서 분화한 양식으로, 정확히는 출목이 없는 주심포 건물을 말함.
[28. 태안 경이정 익공]
익공은 한국건축에서 가장 헷갈리는 용어 중 하나임. 4부에서 살펴보았듯 익공은 살미의 머리장식의 4가지 대분류(제공, 익공, 운공, 두공) 중 하나로,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뜻함. 그런데 "익공식 공포"란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익공과는 큰 관련이 없는 공포 결구방식의 분류의 하나임. 그런데 익공식 공포에서 익공을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이것이 익공식으로 불리게 되었음.
[29. 아산 맹씨행단 익공(1300년대)]
익공의 기원은 명확치 않지만, 신라시대의 화두아(花斗牙)를 그 뿌리로 보고 있음. 문헌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공아와 화두아의 건축양식이 있어 신분별로 건축에 제한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포식과 익공식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우세함.
아산 맹씨행단은 1300년대 지어진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살림집 건물로, 원시적 형태의 익공이 남아 있음. 이어서 세워진 경주 독락당(1516), 강릉 해운정(1530) 등이 초기 주거건축에서의 대표적인 익공식 건축임.
[30. 강릉 해운정(1531).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1. 강릉 오죽헌 이익공(1400년대). 사진 : 문화재청]
익공식은 조선 초기 초익공만 있던 형태에서 이익공과 몰익공으로 분화함. 이익공은 강릉 오죽헌이 그 시초이며, 몰익공은 1500년대 소수서원에서 처음 나타났음.
[32. 황주 성불사 극락전 주삼포(1374). 사진 : e뮤지엄]
한편, 고려말의 주류 양식이었던 주심포식은 점차 간략화되는 양상이 나타남. 6부에서 언급한 바 14세기 주삼포건축에서 헛첨차가 추가되었으나 15세기 쇠퇴하였음을 언급했음.
[33. 안성객사 정청 공포(1300년대초)]
[34. 도갑사 해탈문 헛첨차(1473)]
조선 초기에는 '헛첨차의 익공화'로 볼 수 있는 양상이 여러 면에서 나타나서 주심포와 익공이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음. 먼저 헛첨차의 구조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헛첨차와 살미 사이의 빈 공간이 사라졌는데, 과도기에는 위의 도갑사 해탈문과 같이 공안으로 흔적이 남았음. 이외에도 살미와 살미 사이의 공간도 사라졌음.
[35.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1500년대)]
또 이 시기에는 헛첨차의 조각 형태도 익공과 동화되었음. 위 사진과 같이 연화두형이나 교두형으로 끊기던 헛첨차가 이 시기부터 익공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음.
[36. 고흥 수도암 무루전 공포(1517). 사진 : 두산백과]
[37. 강화 정수사 법당 공포(1423). 사진 : 문화재청]
[38. 안동 봉정사 고금당 공포(1500년대)]
위 사진과 같이 불교건축에서는 주심포가 익공으로 변화하며 과도기적 형태가 나타났음. 이 시기의 공포는 원칙적으로는 출목이 있으니 주심포식이 맞지만, 형태상 주심포건축과의 구분이 필요하기에 출목익공으로 부르기도 함. 초기의 익공은 이와 같이 주로 넝쿨 무늬의 장식이 들어갔음.
[39. 춘천 청평사 회전문(1557). 사진 : e뮤지엄]
이후 16세기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불교건축에서도 출목이 사라진 익공이 쓰였음. 다만 출목익공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쓰였음.
[40. 청평사 회전문. 사진 : e뮤지엄]
이렇듯 익공식은 두 개의 다른 갈래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동화되었음. 이후 익공은 점점 더 보편화되어 궁궐과 사찰에서는 중심부 건물 하나만 다포식으로 짓고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익공식으로 마무리했음. 경복궁에서조차 중심축의 근정전과 사정전만 다포식이고, 경회루, 수정전, 강녕전 등의 중심 건물들은 모두 익공식임.
[춘천 청평사 극락보전. 사진 : e뮤지엄]
사실 목조건축의 분야가 좁기에 학자들마가 통일되지 않은 견해나 용어사용이 많은데, 그것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히 여말선초의 다포와 익공에 대한 부분임. 최대한 다양한 견해를 포괄하여 담으려고 했지만, 간혹 이 글과 다른 주장이 담겨 있는 설명도 존재할 수 있음. 세부적인 항목들보다도 전체적으로 변화해 가는 양상에 주목해서 보기 바람.
이제 조선 초기까지의 건축의 역사가 끝났고, 다음 8부에서는 목조건축의 마지막 글, 조선 후기 건축에 대해 다루게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