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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의용병 인터뷰 : 호스토멜 기억하는 건 나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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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efence24.pl/wojna-na-ukrainie-raport-specjalny-defence24/hostomel-pamietam-tylko-ja-wywiad

 

Hostomel pamiętam tylko ja [WYWIAD]

Jak wyglądała wojna na Ukrainie w pierwszych dramatycznych miesiącach, kiedy był czas nadziei i jak wygląda to teraz? Szczera rozmowa bez upiększeń z Michałem Lipskim „Liptonem”, uczestnikiem wojny w Ukrainie, którego szlak rozpoczął się w lutym 2022 roku w batalionie specjalnym OPFOR (tzw. specnaz szturmowy) i trwał do wiosny tego roku.

defence24.pl



폴란드 의용병 인터뷰(1)로부터 계속됨.


글목록

폴란드 의용병 인터뷰(1)

폴란드 의용병 인터뷰(2)



우크라이나에 도착해서 미국인들과 (앞선)대화를 나눈 후 어디로 갔나?


내가 동의한 대로 곧장 야보리우의 부대로 이동했다.



이전에 NATO 훈련을 받았던 그 부대 말인가?


그렇다.



그럼 당신을 바로 전선에 투입했나? 어땠나?


(부대원)전부 다. 하지만 하나씩 보냈다. 수도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키이우가 먼저였다. 호스토멜, 페트리우카(Петрівка), 즉 키이우 북서부 지역이었다.



거기서 역할은 뭐였나?


첫 번째는 호스토멜 전투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키이우 상황이 진정되자 놈들은 키이우 서쪽 지토미르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우리는 지토미르 루트에서 갈라져 (예를 들면)체르노빌 방향으로 갔다. 지토미르 루트 뒤의 마을을 두세개 탈환하고 나자 놈들은 반격해서 우리를 뒤로 밀어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계속해서 체르노빌을 공격했고, 우리는 재편성해서 호스토멜을 탈환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같은 곳(호스토멜)으로 돌아가란 말이었나?


우리 부대는 이미 호스토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다시 보내는 건 합당한 결정이었다.



호스토멜에서의 첫 전투는 전쟁 초기에 이미 일어났던가? 지금은 유명해진 VDV 선봉대(avant-garde)와 싸워봤나?


그렇다.



이번 전쟁의 핵심 전투였다.


핵심은 아니지만 중요하긴 했다. 그렇게 됐다. 둘이 충돌했는데(kosa na kamień : 낫이 돌에 부딪힌다는 폴란드 속담으로 강한 라이벌 둘이 충돌한다는 뜻), 그때부터 러시아군에겐 모든 게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 놈들은 퍼레이드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놈들에게 총을 쏜 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VDV 정예부대가 그곳에 강하했다. 먼저 영토방위군이 공격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특수부대가 들이닥쳐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게 당신 부대였나?


그렇다.



당시 격돌에 대해 더 해줄 말이 있는가? VDV 선봉대가 정말 그렇게 정예였나?


아시다시피, 우리가 폴란드에서 정예병인 것처럼 놈들도 정예병이었다. 단, 총 맞을 일 없는 평시에 말이다. 경험도 없었다. 놈들은 본인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몰랐고 마치 훈련장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더라. 그런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고 RPG 탄이 쏟아진거다.

우리나 놈들이나 둘다 전투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참호라던가, 몸을 숨길 건물도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마치 퍼레이드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훈련장에 있는 것처럼 BMD 트럭(BMD 계열 수송차량)을 타고 주도로를 따라 운전했다. 그리고 놈들한테 지옥이 찾아오고, 시체들이 수송기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놈들은 어디로 가고 뭘 해야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실제 전쟁이라는 것도 말이다. 놈들은 당시엔 아직 그걸 극복하지 못했고 아직 일렀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호스토멜 이후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우리는 호스토멜을 탈환하고 키이우에서 2주를 보낸 후, 하르키우로 이동했다. 거기서도 절차는 똑같았다. 처음에는 현지 적응(acclimatization)하고 정찰한 다음 계속 이동하는거다. 하르키우 동쪽 – 치르쿠니(Циркуни), 루스키 티슈키(Руські Тишки), 체르카시 티슈키(Черкаські Тишки) 마을, 스타리 살티우(Старий Салтів) 동쪽 및 러시아 국경까지 갔다. 5월이었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우리더러 열정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P(평시)식으로 싸우고 있다고 그러더라. 2월에 키이우로 투입됐을 때처럼 싸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완편을 위해 우리는 키이우로 재배치됐다.



그럼 첫 몇 달은 부분 편성 상태로 싸웠나?


그렇다. 완편 후에는 그들(우크라이나군)이 우리를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야보리우에 있을 때만 해도 우리 부대는 2개 중대급 대대였는데, 6월에는 하나의 부대로 돈바스로 투입됐다. 도네츠크 서부 바흐무트 일대에 도착했다. 그 당시에도 최전선에선 100km나 떨어져 있었고 아직 그렇게 재밌진(fashionable) 않았다.



하르키우 작전에 참가했나?


바흐무트 지역에서 약 한 달간 전투를 벌인 후 우크라이나군은 우리를 북쪽으로 이동시켰고, 약간 전력을 강화한 다음 발라클리야(Балаклія, 하르키우 주)로 갔다. 문자 그대로 일주일 동안 발라클리야에서 출발해 하르키우 북쪽 국경지대의 코자차 로판(Козача Лопань)까지 갔다. 그곳에선 방어만 해서 흥미로울 게 전혀 없었다.

나중에 우리는 바흐무트 샴페인 공장으로 돌아왔고, 리만 근처의 얌필(Ямпіль)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 다음 2022년 말에 다시 바흐무트 및 솔레다르 주변을 돌게 된다. 93 여단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클리시치우카로 재배치됐고 한 달 반 정도 머물렀다. 당시 "위대한(wspaniała, magnificent)" 제47여단은 솔레다르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는 클리시치우카에서 틱톡부대 아조프 “제3 돌격아님(3. Nie szturmowej)” 여단과 교대됐다.



틱톡부대? 카디로비치들만 그런 소리 듣는게 아니었나?


놈들(3돌격여단)이 우리 위치를 인수했는데, 우리 차량들이 놈들을 데려와서 (방어선을)보여줬고, 우리 보병들은 떠났다... 하지만 우리가 떠나고 있는데 3돌격여단이 우리를 추월해서 가버리더라. 우리는 무려 한달 반이나 마을을 지켰는데 놈들은 단 하루만에 포기해버린 거다. 놈들은 체첸 놈들을 비웃지만 하등 나을게 없다. 놈들은 자기만의 브랜드가 있어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홍보는 무역의 지렛대다. 누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로봇은 그렇지 않다. 놈들(3돌격)이 클리시치우카에서 도망치자, 지휘부가 우리를 도로 투입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3~4명이 죽고 최대 10명이 부상당했다. 우리는 참호에 진입하지 못하고 위력정찰만 해야 됐다.



바흐무트 방어에도 참여했나?


그렇다. 그리고 바흐무트 전투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적어도 우리 자신이 보기엔 정예였다. 내가 보기엔 이젠 정예가 아니다. 끝나버렸다.



손실 때문에?


그렇다, 손실 때문이다. 그리고... 상급사령부의 무능함도 한몫했다. 의도한 대로 온전히 활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5월 20일인가 21일쯤 프리고진은 바흐무트를 점령했다고 발표했고, 우리는 하루 뒤에 그곳을 떠났다. 비행기 기념비가 있던 곳이 우리의 마지막 위치였다. 바흐무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방어하라는, 상급사령부의 유연성 부족의 일례다.



거기서 정예부대를 일반 보병마냥 썼다고 하는데...


방어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콘크리트 밑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비가 머리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이었던 건 이 9층짜리 건물 대부분을 폭파할 준비를 했다는 거다. 각 블록마다 100-150개의 대전차지뢰를 배치했다. 얼마나 터뜨렸을 것 같은가? 딱 하나 터뜨렸다. 그 많은 지뢰가 (건물을 폭파하기에)충분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머지 블록은 모두 그대로 뒀다. 왜냐고? 우리 위치를 끝까지 방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거지역에서 원래 실시하려던 계획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밤에 차가 도착해서 인원의 50~70%를 먼저 실어나른 다음, 공병은 전선이 작동하는지 확인한다. 확인했으면 차량이 나머지 인원을 태우고 쾅, 하고 폭파시킨다. 그리고 나서는 이미 다음 위치로 이동해서 (적을)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싸워야 했다. 건물을 폭파시켰다간 잘 해봤자 우리까지 날려버렸을 거다. 준비된 퇴각계획은 전혀 실행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 정예병들은 시들어버렸고, 나중엔 17기갑여단(제17 전차여단)에 배속되면서 끝났다. 우린 순환도 없이 4개월간 바흐무트 반대편 이바니우스케(Іванівське) 앞 마지막 언덕을 지켜냈다.





또다른 소모전이 벌어진 건가.


언덕은 4~5층 높이였다.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있던 9층짜리 (바흐무트)블록은 우리 위로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는 4개월 동안 저격수들과 문제를 겪었다. 그리고 언덕은 전차나 포병으로도 쉽게 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17전차여단더러 "전차없음(tankless)"이라고 비웃었다. (17여단은)분명 전차가 있는데, 우린 본 적 없고 여단은 우리를 일반 보병으로 써서 위치를 사수했다.

이 4개월 동안 우크라이나군은 훈련을 마치자마자 2~3일만에 바로 신병들을 투입했다. 사상자가 많았다. 중대 구성원들은 두세 번이나 바뀌었다. 이런데 무슨 정예를 논하겠는가? 중대원들 중에 클리시치우카를 기억하는 고참병들은 셋이다. 그리고 내가 네번째 + 그리고 장교 한 사람도 있다 치자. 자, 다섯만 남은거다.



그럼 첫 전투였던 호스토멜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나 하나뿐이다.

그리고 (하르키우)발라클리야를 기억하는 사람은 우리 중 두 사람뿐이다... 우리는 제17 "전차없음”여단에서 4개월을 보냈고 우크라이나군은 우리를 보흐다니우카(Богданівка, 바흐무트 북서쪽)에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제42여단으로. 재밌는 일이 또 벌어졌는데, 약간 더 나은 건 있었다. 저격수는 없더라.


폴란드 의용병 인터뷰(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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