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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르는 남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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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尹致昊)


커뮤에선 촌철살인의 어록으로 유명하지만


다들 막연히 친일파였겠구나~ 하고 넘어가지



이 사람이 한때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던 사실은 대부분 잘 모를것이다




간단한 약력을 살펴보자면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제2대 사장
•(現 연세대학교의 전신) 연희대학교 제4대 총장
•대한체육회 제9대 회장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이 있다.



커리어만봐도 화려해 보이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친일파가 됐을까?




오늘은 1승갑으로 널리 알려진 윤치호에 대해 알아보자









윤치호는 해평 윤씨 출신으로, 조선 후기 무관이던 윤웅렬과 첩이었던 전주 이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참고로 4대 대통령 윤보선이 그의 조카다.)


본디 그의 집안은 한양의 양반 가문이었으나 몰락했고,

심지어 윤치호는 서얼(서자) 출신이었다.



허나 그의 아버지도 어린시절 같은 처지였어서 그런 설움을 잘알았기에 1907년 재혼하지않고 첩을 본부로 올려 윤치호를 적장자로 만들어준다.



















그의 아버지 윤웅렬은 똑똑한 아들 윤치호를 무던히 신경썼다.



당시 개화파였던 친구 어윤중에게 제자로 삼아주길 부탁했고,



17살때 일본으로 건너갔을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도 아들을 잘 돌봐달라며 여러번 간청했다.



그리하여 유길준 , 김옥균 등과 함께 동인학당에 들어가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서구의 과학과 의학, 사상과 종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윤치호는 중국과 조선의 유교사상에 대해 반감을 갖게 돼 개혁을 결심한다.
















당시 윤치호는 통역관으로서 고종과 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한 직후 , 그는 만주로 도피한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미국에서의 유학은 윤치호에게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심한 인종차별을 통해 백인종에 대한 컴플렉스에 가까운 적개심이 생겼고


이런 냉엄한 국제사회를 제대로 못 읽는 조선 지배층과 구습에 대한 감정은 극에 달해 혐오의 수준으로 변질되게 된다.



























유학이 끝나고 귀국한 후 , 그는 기독교 합리주의를 통해 조선 민중을 깨우치겠다고 결심했다.


실제로 독립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만민공동회 강연활동으로 민주주의와 평등론, 참정권을 주장한다.



허나 대중적인 구심점이 없는 계몽활동은 한계에 봉착할수 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고종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일본의 프락치라고 생각하고 해체하자,



윤치호는 더 이상 조선에 대한 발전 의지를 접어버리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 민중에 대해서도 점점 비관적으로 변하는데,




그가 민권과 참정권을 부르짖어도 조선인들은 그저 황제에게 반기드는자 정도로 그를 낙인찍었다.

개화라는 단어 또한 반역질 정도로 인식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본 윤치호는 이윽고 민중에 대한 애정을 경멸과 증오로 치환했다.



그의 가치관이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기운것도 이 당시 이야기다.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어록들의 상당수도 이 시점에 나왔다.










내 나라에 퍼붓는 경멸에 대해 내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그런 한편 내 나라가 갱생할 가능성에 대해 내가 얼마나 절망하는지, 어느 누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까? 분노와 절망이 일으키는 감정의 불쾌함과 쓰라림을 솔직히 말해서 견딜 수가 없다.


- 1898년 윤치호 일기 중에서

























저열하고 무능한 조선의 민족성으로는 자치를 손에 쥐어준다고 해도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 1910년 윤치호 일기 중에서




경술국치 이후, 그는 일본의 지배에 대해 순응하는 길을 택했다.




창씨 개명을 하고 , 학병 권유도 했으며 , 1940년대 쯤에는 총독부 고문과 중추원 고문에 자리에도 올랐다.



이 사람의 일본제국에 대한 찬양은 말기가 될수록 심해지는데


일제가 홍콩을 점령하자, 동양에서 백인의 지배를 무너뜨렸다고 기뻐하며 모든 유색인종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칭송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전형적인 변절한 친일파로 보이겠고,

실제로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가 빠지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다만 이 인간을 단순 친일 매국노로 보기엔 애매한 구석이 많다.




3.1 운동에 대해서는 참여를 거부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도

일기에는 시민들이 애국심을 가지고 위험에 달려드는걸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고 쓰거나,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자기 목을 그으면서까지 일제에 대항하는걸 보고 감격했다고도 저술했고 일제 경찰에 대한 증오도 드러냈다.






일제가 패망할때까지 내선일체를 부정한것도 특기할 점이다.

실제로 창씨개명에도 계속 비협조적이었지만 본인 가족에게 피해가 가게하지 않기 위해 한것이고


위에 말했던 중추원 고문같은직도 총독부의 권유를 계속 고사하다가 종국에 받은 것과,


그외에도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 행사같은것도 단 한번도 참석한적이 없고, 신사참배 또한 거부했다.


임시정부나 독립인사들과 교류도 잦았고 정보도 많이 알았지만 이를 총독부에 누설한적도 없었다.







되게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사실 윤치호는 교육과 계몽 활동을 한것에서 보듯이 민족주의 성향이 어느정도 있는 인물이었는데


일제가 다민족 제국이 되기를 원했으며, 일기에도 조선이 영국의 스코틀랜드처럼 될수있기를 희망한다고도 하였다.





일본제국을 백인종에게 대항하는 동양인들의 희망 정도로 여긴 것이다.












나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는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는 조선의 모든 것, 독립까지도 앗아가고 있는 일본을 증오한다.

- 1930년대 윤치호 일기 中




























시간이 흘러 1945년 8월 15일,




그가 그토록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조선의 독립이 결국 이뤄졌다.


윤치호는 이승만과 김구, 미군정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어쩔수없이 일본에 협력할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과


독립은 독립운동가들 때문에 이뤄진게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아예 독립운동가들을 한것도 없으면서 거들먹 거리는 위선자들이라고 비난을 한건 덤.






그리고 조선이 제대로 서려면 국민을 엄하게 이끌 스트롱맨이 필요하다고도 설파했는데,




후에 실제로 이승만과 박정희같은 권위적인 지도자들이 나타난걸 보면 재밌는 점이다.













아무튼 윤치호는 광복 이후에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누그러 뜨린건지 아니면 독립이란 현실 자체를 받아들인건지




어느날인가는 지나가던 미국 군인이

" 미군이 가장 무서워 하는게 세가지 있다. 다이어리아(설사) , 고우너리아(임질) , 코리아 " 라는 농담을 하자,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하냐고 영어로 따지기도 했다.







다만 얼마 못가서 기간중풍을 앓다가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에 개성 장남의 집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가 최후 운명을 할 때에,

"모든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는 삼가라"고 비장한 유언을 남기었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 라는 단어가 이따금씩 등장한다.



이 말은 그의 인생관을 극명히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조선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윤치호는 당대를 가장 정확히 분석했고 이승만에 버금가는 정세를 읽는 능력과 혜안이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본과 친해져야하고 그래야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 그게 옳다고 진실로 믿었기에 소신껏 친일을 했다.





그러나 현실에선 결국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한국은 독립을 맞았고, 최후에 이르러 윤치호의 관조(觀照)는 부정당하게 된다.




어찌보면 그의 성찰같은 마지막 유언이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는걸까?









본인은 윤치호란 사람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사로운 논쟁을 떠나 참 연구가치가 높은 인물이라고 본다.


































나는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양면을 너무 많이 보니까요.


- 1885년 유길준과의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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