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황제 휘종이 사랑한 여자, 기생 '이사사' 이야기
번영하는 제국의 동경, 개봉(변경 汴京)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가난한 형편의 왕씨였고, 어머니는 여자아이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가난한 염색공이었던 아버지는 갓난아기에게 젖대신 콩죽을 먹여가며 어떻게든 홀로 키워보려고 했지만, 자식의 복을 기원하는 당시의 관습과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의 어려움으로 인해 아이를 절에 맡겼다.
절의 스님들은 아이를 보고 부처님을 대하듯 매우 정중하게 맞이했고, 그 모습을 보고 감격한 왕씨는 아이의 이름을 사사(師師)로 결정했다. (사師’는 비구니尼師의 약칭으로 송대의 여성들 중에서는 이 이름을 가진 자가 무척 많다.)
그러나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왕씨는 끔찍한 현실을 맞이해야했다. 관의 염색공으로서, 도저히 납품기한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송나라는 겉으론 개봉의 화려한 불야성을 뽐냈지만 속으로는 이미 뼛속부터 부패한지 오래였다. 아마 왕씨 또한 중간 관리들에 의한 농간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왕씨는 곧바로 옥에 갇혔고, 얼마 지나지않아 옥안에서 숨을 거뒀다.
한순간에 천애고아가된 사사는 나이가 차자 고아원에 보내졌지만, 곧 어디론가 팔려가게 되었다.
그날, 구운 돼지고기와 생선과 설탕 냄새, 그리고 저 멀리 변경성 바깥의 과수원에서 불어오는 향기 때문에 깨어난 어린 사사는때아닌 저녁산책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는 휘황찬란한 개봉 거리의 모습을 거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밤인데도 수많은 연등들 덕분에 낮처럼 밝은 거리는 일을 막 마친 술꾼들로 붐볐고, 이제 막 개업한 술집들은 손님들에게 황금색 깃발을 나눠준다고 소리쳤으며, 3층이 넘는 고층 건물들은 저들끼리 공중다리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건너고 있었다.
어린 사사는 가장 높은 건물을 가리키며 마부 아저씨에게 저기에 올라가 볼수는 없냐고 물었다.
“저 내서루(內西樓)는 황제 폐하가 사시는 곳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아서, 올라가는 것이 금지되었단다.”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던 사사였지만, 다시 강 위의 부드러운 아치형 다리와 다리 위의 연인들을 보고 또 다른 기대를 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그네를 타면서 웃는 소리, 공을 차는 멋진 소년들, 그리고 귀엽게 생긴 어느 언니의 머리에 푸른 꽃가지를 비녀대신 꽂아주는 멋진 청년을 보고 사사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마차는 이윽고 오색비단과 연등으로 장식된 어느 환문(歡門) 앞에서 멈춰섰다. 환문 주위의 여러 가게들 바깥에서는 예쁜 화장을 한 여자들이 지나가는 사내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고 있었다. 환문 바깥으로 한 중년의 여인이 마중을 나왔다. 사사의 얼굴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포주 이씨(李姥)였다. 사사는 그때부터 이씨 성을 받아 이사사(李師師)가 되었고, 기적에 올라 기생의 삶을 살게되었다.
이사사는 자라날수록 뛰어난 외모와 대단한 노래실력으로 개봉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바둑이면 바둑, 서예면 서예, 그림그리기와 가야금 연주까지, 선비들의 소양뿐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재능또한 출중하여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팔방미인이었다.
그런데다가 그녀는 화려하게 입고 진한 화장을 하며 밝게 분위기를 띄우던 당시의 기녀들과 달리, 수수한 모습으로 늘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줄였기에 그 독특함으로 인해 더욱더 인기를 끌었다. 이사사가 늘 우울한 모습이었던 것은 아마 그녀의 유년기에 드리웠던 짙은 그림자 때문이었겠지만..
이사사의 예술가적인 면모와 그 아름다움은 이내 황궁의 담을 넘어 천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환관 장적이 황제에게 출궁을 권유하며 넌지시 그녀의 이름을 건넸던 것이다. 당시 북송의 황제는 희대의 혼군이자 뛰어난 예술가였던 ‘풍류천자 ‘ 휘종이었다.
풍류천자 송 휘종
매일같이 궁궐에서 공놀이와 주색잡기로 점철된 연회를 일삼으며 아름답게 생긴 암석들을 수집하느라 국고를 거덜내는 데에도 싫증이 났는지, 그는 총애하던 환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인 행세를 하여 궁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휘종은 평소에도 궁밖 백성구경을 즐겼지만 이렇게 변장을 한 채 산책을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천자의 마음은 바깥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이사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과연 이미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여인들을 섭렵해온 자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여자일까 기대하며 휘종은 어둠이 내린 개봉의 거리를 겨우 시종 몇만 거느리고 직접 걸어갔고, 이사사가 있는 기방의 주인 이씨에게 금은보화를 건넸다.
주인 이씨의 안내를 받아 어느 운치있는 분위기의 작은 방에서 홀로 식사를 하게된 휘종은 창밖의 대나무를 보며 이사사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휘종은 이사사가 깔끔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이씨의 권유에 목욕재계를 마쳤지만 아침해가 뜰때까지도 홀로 술을 마셔야만 했다.
마침내 어슴푸레 방안으로 햇살이 들어오던 그때, 이씨가 이사사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고. 휘종은 그녀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수수한 화장과 흰 옷을 걸치고 나온 이사사는 자그마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을 다스리는 천자에게 경멸하는 표정을 내비쳤고, 예를 갖춰 인사하지도 않았으며 어떤 말도 먼저 건네지 않았다.
이씨는 휘종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연신 사과했지만, 휘종은 개의치않아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뿐, 시선은 계속해서 이사사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휘종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과연 절세미인, 경국지색이구나. 어디 네 인생 이야기를 조금 들려줄 수 있겠느냐.”
이사사는 휘종의 말을 무시했다. 휘종은 당황하여 계속해서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며 물었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이사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당황한 이씨는 황제에게 다가가 다시금 감히 귓속말을 하며 사과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이사사는 이씨가 나가자 아무말 없이 가야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포함한 각종 예술에 정통했던 황제답게 휘종은 그 실력의 대단함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몇 곡의 연주가 끝나자, 날은 밝았고, 휘종은 만면에 피어오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환관들을 거느린 채 궁으로 되돌아갔다.
이씨는 어째서 귀한 손님을 그리도 박하게 대하였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이사사를 꾸짖었다. 그러나 이사사는 원래부터 상인이라는 부류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를 기생집에 팔아버린 것도 상인이었고,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에 갇힌 것도 상인들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켠엔 이미 어떤 손님들과도 다르게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해주었던 전날의 손님이 머무르게 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황제가 변장하여 이사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개봉 저잣거리를 떠들석하게 메웠다. 황제에게 귓속말까지 했던 포주 이씨는 사색이 되어 계속해서 자신의 오만불손함을 자책하며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 두려워했지만, 이사사는 그 날의 황제의 표정을 떠올리며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이씨를 안심시켰다. 다만 이사사는 어린 시절 보았던 내서루의 높은 누각을 떠올리며 우울에 빠졌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만큼 크나큰 신분의 격차가 느껴졌던 것이다.
몇개월 뒤, 휘종은 다시금 이사사를 찾았다. 이사사는 황실을 방불케 할 아름다운 최고급의 방에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황제를 맞이했고, 휘종은 벌벌 떠는 이씨를 보고 호탕하게 웃으며 아무 걱정하지 말라 일렀다.
다만 휘종은 화려한 방의 모습과 음식들이 황실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전의 소박한 음식들과 다르게 바뀐 음식들은 이씨가 황제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황실 요리사에게 거금을 주고 부탁한 것이었다. 휘종은 자신이 한낱 금관과 용포 덕분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또 그 때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허무해졌다.
휘종은 세상 구경하는 것에 질려 궁궐로 돌아왔고, 황제가 기녀와 놀아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현숙황후 정씨(송나라 흠종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황제에게 위험한 일을 그만둬주실 수는 없겠냐고 간언했다. 휘종은 그때부터 이사사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로 하사해줄지언정, 만나러 가지는 못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도저히 황제는 이사사가 그리워 참을 수가 없어졌다. 결국 다시 이씨의 기방을 찾았고, 이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사사는 여전히 자신의 그림 속 그 모습과 똑같아 보였다. 휘종은 다시 궁에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사사를 그리워했다.
황제가 여전히 천하디 천한 한낱 기생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아차린 현비 위씨 (훗날 현인황후 위씨, 송나라 고종 조구의 친어머니)는 휘종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부분이 매력적이기에 이토록 폐하의 총애를 얻는 것이냐고 물었다. 휘종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후궁 백명이 화려하게 화장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서 있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연스럽고 수수하지만 신선처럼 고귀해 보인다. 이는 현세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것이다.”
이후 휘종은 이사사를 자신의 후궁으로 들여 천한 신분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휘종과 이사사의 사랑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드리웠다.
안으로는 무거운 세금과 중간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방랍의 난) 바깥으로는 저 멀리 변방의 여진족들이 세운 금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선 파죽지세로 송나라의 군대마저 무너뜨린 것이다.
여진족들의 군대가 이내 수도 개봉에 다다르자 겁에 질린 휘종은 아들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한 뒤 적을 막게 내버려두고는, 스스로는 교주도군태상황제라는 도사 겸 황제의 자리에 올라 지 혼자 살겠다고 남쪽으로 피신하였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린 이사사는 그 동안에 황제의 총애에 힘입어 누리던 부귀영화를 잃어버린 채, 언제 궁중암투에 희생될지 모르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사사는 태상황이 되어 도망가버린 휘종에게 출궁하여 마치 황제가 그러했던것처럼 자신도 여도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휘종은 흔쾌히 허락했고, 절의 아이 사사는 기생의 몸에서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사사는 그동안 모은 재물을 이용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도술을 연구했지만, 당연하게도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개봉을 함락시키고 닥치는 대로 도시를 약탈하던 금나라의 병사들이 그녀의 사원에 들이닥쳤고, 그녀를 금나라의 황족이나 대장군에게 첩으로 바치기 위해 다가갔다.
이사사는 언제나처럼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다가 머리에 꽂혀있던 금비녀를 빼 들어 목을 찔렀다. 한번에 죽지 못한 이사사는 다시 금비녀를 뽑아 둘로 쪼갰고, 그것들을 삼켜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아들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 신세가 되어 삭풍이 부는 북방으로 끌려가던 휘종은 이사사의 죽음을 전해듣고 그저 눈물만 흘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